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2장—기독교 지하드8)
 제2장 기독교 지하드8) (요한계시록 4:1~8:1)

8) 이슬람교도들이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투쟁을 벌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개는 “성전(聖戰)”이라고 번역된다.(역자 주).
(70.1)
 샤부오트(Shavuot)
 그리고 실제로 요한계시록 3장의 문은 또 다른 문과 상응하는데, 곧 요한계시록 4장“하늘에 [있는] 열린 문”이 바로 그것이다. 인자의 음성은 다시 요한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이 선지자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계 4:1)고 말한다. 그는 올라가서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1) 것을 본다. (74.1)
 계시록은 보좌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가장 많은 책이다. “보좌”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이 신약에 62회 나오는데, 그 중 47회가 계시록에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마태복음에 단 4회가 있다. 요한에게 보좌라는 주제(motif)는 중요하다. 보좌에 대한 언급은 카이사르의 보좌에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보좌라고 하면 왕정 시대의 흔적 이상으로는 별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도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를 여러 번 언급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보좌”가 참으로 존재하며 그 보좌는 다른 모든 보좌들보다 높이 있음을 깨닫 게 해 준다. “보좌”4장의 키워드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그 단어의 47회 용례 중에 14회가 4장에 있다.

  (74.2)
 요한은 그 보좌에 대하여 언급만 할 뿐 그것을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해서도 요한은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는 시적(詩的)으로 그분을 세 가지 보석, 즉 벽옥, 홍보석과 녹보석에 비유한다. 이러한 특정한 조합은 의미심장한 것인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흉패에 동일한 세 가지 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출 28:17~19). 이는 성경에서 이 세 보석을 함께 언급한 유일한 경우이다. 요한은 보좌 위에 앉으신 신비로운 분에 관련하여 그 세 보석 밖에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다시 성전을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75.1)
 보좌 위의 무지개는 그 장엄함을 더해 준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홍수 후에 나타난 희망의 무지개를 연상시킨다. 은혜의 상징인 무지개는 보좌에서 그려지는 공의의 느낌을 조금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장차 임하게 될 역사적 혼돈과 하나님의 진노의 전조1“번개와 음성과 뇌성”(계 4:5) 가운데 무지개는, 그분의 공의와 함께, 구원과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무지개는 또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겔 1:28), 다시 말해서, 그분의 무한한 위대함과 능력의 표현이다. 그 거대한 활은 하늘과 땅, 즉 우주 전체를 품는다. (75.2)
 보좌 주위에는 24장로(長老)가 앉아 있다. 그들의 나이로 볼 때 그들은 머리가 흰 심판자(1:14)와 상응하며, 그들도 그분처럼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그들 역시 심판자인 것으로 나타난다.2 이제 그 24장로는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의 “이기는 자들,” 인자와 함께 보좌에 함께 앉아(계 3:21) 심판을 돕도록 초청 받은 이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20장까지는 그들 이 심판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들이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계 4:9~11). 잠시 후에 나오는 그들의 의무는 “성도의 기도들”을 전달하는 일이며(계 5:8), 그들 중 하나는 심지어 요한에게 마지막 남은 무리가 누구인지 알려주기도 한다(계 7:13, 14). 이러한 책무들은 심판자 보다는 제사장의 의무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 두 역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보좌에 앉은 그들은 대제사장처럼 제사장과 심판관의 이중 임무를 수여받았다. 그러한 결합은 모세의 시대로부터 유래되는데, 그 당시 제사장은 심판관이기도 하였다.3

  (75.3)
 물론 24라는 수는 상징적이다. 그 수는 언약의 숫자인 12와 관련되어 있다(땅의 수인 4와 하나님의 수인 3을 곱한 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계시록에서 확실하게 입증된다(계 21:12, 14). 12라는 숫자는 언약의 백성, 남은 자손, 이스라엘 전체, 계시록의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숫자 24는 또한 24반열(班列)의 제사장들이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봉사를 상기시킨다(대상 24:1~19). “다스리는 자”(대상 24:5, 새국제역[NIV]에서는 ‘official’이라고 번역함)가 각 반열을 통솔하였다. 흥미롭게도 미쉬나에서는 그들을 “장로”라고 부른다.4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노래하는 자들도 24개의 반열에 속하였으며(대상 25:1~31),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수금(竪琴)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계 5:8; 참조 대상 25:1, 6, 7). 장로들의 활동은 다름이 아니라 하늘에서 경배를 드리는 것이었고, 지상의 성전 예배는 단지 그것을 반사하는 것이었다.5 (76.1)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는 보좌 앞에 한 없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계 4:6), 그래서 그 광경의 차원이 우주적인 것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물 위로 공중에 떠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은 모든 요소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한다. 창세기는 이 세계의 창조를 공허와 흑암의 상징인 물이라는 요소를 정복하는 차원에서 묘사하고 있다.6 (77.1)
 후자의 주제는 시편과7 이사야서에도8 등장한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만물 위에 주권을 행사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분의 보좌가 물 위에 있다고 표현한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시 104:3). 솔로몬이 성전에 만들어 놓았던 놋 바다(대하 4:2)는 아마도 이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적(神的)인 심판자, 우주의 왕이 창조주로 나타난다.9 (77.2)
 흥미롭게도, 창조에서도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던(창 1:2)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계 4:5)이 창조의 상징인 유리 바다에 앞서 나온다. 나아가, 땅을 대표하는 네 생물에 대한 묘사가 유리 바다에 대한 묘사를 뒤따른다. 고대 근동의 다른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땅의 차원을 상징한다. 우리는 구약과10 신약에서11 공히 땅의 사방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다니엘은 하늘의 네 바람에 대해서 말했는데(단 7:2), 그것 또한 땅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인류의 역사(단 2장7장)를 네 나라의 상징을 통하여 이야기하였다. (77.3)
 네 생물에게 가장 두드러진 면은 그들의 생김새이다. 첫째는 사자와 둘째는 소와 셋째는 사람과 넷째는 독수리와 닮았다. 고대 유대인의 이야기인 미드라쉬도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 랍비 아바후(Abahu)에 의하면, 힘센 네 동물이 있는데, 새 중에 가장 힘센 것은 독수리요, 가축 중에 가장 힘센 것은 소이고, 야생에서 가장 힘센 것은 사자이며, 모든 동물 중에 가장 힘센 것은 사람이라고 하였다.12 전승에서는 이 네 짐승이 모든 피조물을 대표한다고 여기며, 24장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인류를 예시한다고 한다. 계시록은 세상의 창조를 보좌 이상의 핵심에 두고 있다. (77.4)
 24장로가 네 생물의 찬양에 화답하여 부르는 노래 또한 창조를 가리킨다. 첫째로, 네 생물이 3중의 운율로 노래하면서 보좌 위를 맴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8). 이러한 대구(對句)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시간과 역사의 세 부분인 과거, 현재, 미래에 친히 나타남을 보여 준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룩하시다. 선지자 이사야도 비슷한 이상을 받았다(사 6:1~3). 거기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강조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 (78.1)
 이제 24장로는 보좌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던지며 엎드려 경배한다. 그리고 그들은 번갈아 찬양한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속 노래한다. 그들의 예배는 그치지 않는다. (78.2)
 그 장면은 시간과 공간을 아우른다. 그 대상, 음성들, 모양들, 인물들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대한 동일한 경배를 표상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 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78.3)
 하나님이 심판자와 왕으로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우주의 창조주 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우리의 경배는 우상 숭배가 될 것이다. 사람은 창조주를 숭배할 수도 있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숭배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구원을 판단하실 수 있다. (78.4)
 “합당하오니”(4:11)라는 말은 “누가 합당하냐?”(계 5:2)라는 질문을 예견하고 있다. 큰 소리로 외치는 이 질문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심판자의 오른손에 있는 인봉한 책에 대한 것이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절). 그 질문이 던져졌을 때 온 우주는 침묵한다. “하늘이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3절).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요한은 망연자실하지만, 장로 중 하나가 그를 안심시킨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절). (78.5)
 그 후에 그는 합당한 자가 천사의 존재들 사이에 “보좌의 중심에” 서 계신 것을 본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힘센 사자, 즉 승리를 거둔 유다 지파의 사자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대신에 보좌의 가운데에는 연약한 어린양, 희생 제물인 어린양이 있다. 능력과 연약함이 결합된 이 역설은 어린양의 이중적인 성격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는 일곱 뿔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뿔은 능력을 상징한다. 그 어린양에게는 또한 “일곱 영”(6절)이기도 한 일곱 눈이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이든지 다 보고 다 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스가랴 4장 10절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79.1)
 명백히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은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의 사자(5절), 특별히 그분의 겸비와 희생을 통하여 죽음과 죄악을 이기신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 어린양은 인봉된 책으로 다가간다.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7절). (79.2)
 그 다음에 요한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계신 것을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샤부오트(오순절), 즉 칠칠절 기간에 즉위하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가 묘사한 것과 매우 유사한 이미지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 33).14 (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