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2장—기독교 지하드8)
 계시록의 이 장면은 고대 근동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즉위 예식을 따르고 있다. 새로운 왕은 자신과 그의 종주(宗主) 사이에 맺은 언약을 소리 내서 읽는 것이 관례였다.15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도 새로 왕관을 받은 왕은 “언약의 책”16을 읽음으로써 즉위식을 시작하였고, 그렇게 종주권(宗主權)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표현하였다. (79.4)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예식(출 19, 20장)도 동일한 시나리오를 따랐다.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께서 양면에 쓰신 문서를 받았다(출 32:15; 참조 계 5:1). 마찬가지로 천둥, 번개와 나팔소리(출 19:16; 20:18; 참조 계 4:1, 5)가 그 장면에 함께 하였다. 게다가 여호와께서는 선지자에게 “올라오라”고 불렀고, 그는 계시를 받았으며(출 19:24: 참조 계 4:1), 백성은 제사장 민족이 되도록 하였다(출 19:6; 참조 계 5:10). 마지막으로, 그것은 성소 봉사를 개시하는 장면이었다. 출애굽기 19~20장은 지상 성소의 시작이고 요한계시록 4~5장은 하늘 성소를 여는 것이었다. (79.5)
 계시록의 선지자는 예수님의 즉위를 성소 봉사의 개시로 해석한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해석의 중요성에 빛을 던져 준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1~2). 이렇게 레위기의 용어로 포화 된 표현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여전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가지는 역할과 실제 가치를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예수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80.1)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즉위는 오순절 전례(典禮)의 배경 안에서 일어났다. 이미 지적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지금 연구하는 구절에는 오순절 기간에 가장 많이 읽는 전례식문(典禮式文)인 출애굽기 19~20장과 상응하는 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 오순절의 사건과 예수님의 즉위를 짝지어 줌으로써(행 2:1, 34) 이러한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해 준다. 계시록에서 일곱 인을 떼기 위하여 준비하는 오순절 장면은 앞 장에서 일곱 편지를 읽기 위한 도입부에 나오는 유월절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계시록은 유대인 절기의 달력을 따르고 있다. 오순절은 유월절 바로 다음에 있으며, 유월절의 둘째 날로부터 세어 내려가서 50일째가 되는 날이다(레 23:15, 16).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리스어의 50을 뜻하는 말에서 그 날의 영어와 그리스어 명칭이 왔으며,9) 히브리어 명칭인 샤부오트(Shavuor)는 “주일(週日)들”(weeks)이라는 뜻으로서 이 기간에 해당되는 일곱 주일(7 × 7)을 가리키는 말이다.

9) 우리말의 오순절(五旬節)도 동일한 의미이다(역자 주).
(80.2)
 사실상 유대인들의 샤부오트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이 기독교 오순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샤부오트는 추수의 절기이자 초실절(初實節)이다(출 23:14~19: 레 23:9~22).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오순절도 첫 회심, 그리스도교 선포의 첫 열매들을 기념한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꿈의 성취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계 5:10: 참조 1:6; 출 19:6). (81.1)
 기독교 오순절은 최초로 성령을 다수에게 부어 주신 것을 기념한다.18 여기 계시록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계 4:5; 5:6)이라는 말로써 그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순절은 특별 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천상의 즉위에 연결되어 있다. 계시록은 어린양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계 5:5)를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영원한 다윗의 왕조에 관한 고대의 약속을 성취시킨다.19 하나님의 오른편에 선 인자에 의하여 거행되는 의례를 통하여 하늘 만군의 찬양에 맞추어 그분은 영원한 다윗 가문의 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81.2)
 하늘의 만군의 기쁜 음성, 어린양이 합당함을 노래하는 예식의 찬송은 이제 “누가 합당 하냐?”하는 물음에 대하여 대답한다. 예식의 찬양은 4부의 크레셴도로 그 주제를 되풀이 한다. (81.3)
 1. 첫 번째 성부(聲部)는 네 생물과 24장로의 소리로서,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9절)니 “합당하도다”라고 노래 한다. 거문고 소리가 노래에 맞춘다. 음악은 향과 섞이는데, 그것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기도와 연결된다(8절). 참으로 전에 부른 적이 없는 “새 노래”(9절)는 새로운 정서와 새로운 가락을 가진 새로운 시(詩)이다. 시편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하는 철저한 심령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대개 그 표현은 창조의 문맥에서 나타난다.20 (81.4)
 2. 우리가 듣는 다음 음성은 천사들의 찬양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절). 일곱 가지의 특성은 능력의 상징 인 일곱 뿔을 메아리친다. (82.1)
 3. 온 우주는 이제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13절)의 노래로 가득 찬다. 그들의 음성은 거대한 천사들의 합창의 마지막 부분을 역순(逆順)으로 반향한다. 천사들은 “능력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12절)을 노래했었다. 이제 땅의 만물은 앞선 합창에 화성을 넣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13절)으로 화답한다. (82.2)
 4. 마지막으로 네 생물은 감동적인 “아멘”(14절)으로 끝을 맺는다.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고, 예배는 침묵으로 마친다. 말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침묵만이 표현이 불가능한 것을 표현할 수 있다. (82.3)
 일곱 인
 우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첫마디부터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말했었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 4:1).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일곱 인의 이상은 일곱 교회의 이상과는 다르다.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선지자는 “장차 될 일”뿐 아니라 “이제 있는 일”도 보았다(계 1:19).21 그러나 일곱 인의 이상은 계시록의 전환점이다. 지금부터 이상들은 일차적으로 미래에 관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82.4)
 그 단락은 이미 이것에 대하여 암시를 준 바가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며, 그 손은 역사의 행로를 주관하고 있다.22 계시록은 그 책의 내용은 알려주지 않고,23 그 형태만 나타내 줄 뿐이다. 그 책은 당대의 대다수 법적 문서들이 그러했듯이 양쪽 면에 기록된 필사본이다.24 또한, 그 두루 마리를 펼쳐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봉인(封印)들을 모두 제거해야 하였다. 일곱째 인에 가서야 우리는 그 두루마리의 목적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야 소망은 완전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82.5)
 일곱 인의 이상에서 되풀이되는 “오라”는 말은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에서처럼 시간상의 진행이 있음을 보여 준다. (83.1)
첫째 인 : “오라”(계 6:1) 다섯째 인 : “어느 때까지”(10절)
둘째 인 : “오라”(3절) 여섯째 인 : “이르렀으니”(17절)
셋째 인 : “오라”(5절) 일곱째 인 : “침묵”(계 8:1)
넷째 인 : “오라”(7절)
 네 생물 중 하나가 각각 반복하는 “오라”는 말은 요한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며 그때 그때 나타나는 말들에게만 부분적으로 해당된다. 사실상 “오라”는 말은 어린양을 부르는 말이며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 파루시아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어 동사 에르케타이(erchetai)는 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기술적인 용어이다.25 이 동사의 명령형인 에르쿠(erchou)는 처음 네 인을 뗄 때는 “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고, 책의 결론부에는 탄원의 기도(“오시옵소서”)로 등장한다(계 22:17, 20). (83.2)
 다섯 째 인에서 “어느 때까지”(계 6:10)라는 부르짖음은 긴박감으로 떨린다. 그것은 마지막에 가까운 사람들의 탄원이다.26 여섯 째 인에서 요한은 “이르렀으니”라고 말함으로써 그 강림을 현재의 사건으로서 경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인은 “강림”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고, 단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 때가 된 것이다. (83.3)
 일곱 인은 그렇게 어린양의 재림의 길을 열면서 역사의 행로를 강조하고 있다. 일곱 교회처럼 우리는 예언적 의미에서 일곱 인을 해석해야 한다. (84.1)
 일곱 인의 이상은 일곱 편지의 이상과 평행을 이루며 전개된다. 그 둘은 동일한 이야기를 써 나가지만 강조점은 서로 다르다. 일곱 편지는 교회의 이단들에 대하여 책망하지만, 일곱 인은 그들의 압제, 폭력과 박해에 대하여 정죄한다. (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