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1장—교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제1장 교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요한계시록 1:11~3:22)
 페사흐
 일곱 교회 단원의 도입부 이상(異像)이 우리를 촛대 곁으로 인도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원후 70년에 로마 군대가 성전을 파괴하고 나서 어떻게 그 성전 촛대를 전리품으로 취하여 갔는지를 독자에게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서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을 정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아치에 그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38.1)
 그 이상에 나타난 광경은 성전이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 촛대가 겉으로 보기에는 로마의 보물 창고 안으로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일곱 교회라는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그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이 그들 홀로 견디며, 험난한 역사의 굽이굽이를 그분 없이 지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셰키나로써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아직도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리라(레 26:12).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에도 동일한 약속이 들어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출애굽을 인도한 것은 셰키나, 즉 불같은 구름이었다.(출애굽기 3장의 불타는 떨기나무와 비교해 보라). 마찬가지로 인자(人子)의 임재는 “불꽃” 같은 눈(계 1:14),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16절),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로써(15절) 촛대의 빛을 영속시키며 그 백성의 행로를 인도한다. 이처럼 금으로 옷 입은 인자의 이상 은 촛대의 빛나는 광채에 녹아들어 미래의 금 도성 예루살렘을 언뜻 보여 준다. (38.2)
 안식일 다음에, 계시록은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18절),1 그리고 백성 중에 있던 셰키 나에 대한 암시를 통하여 유월절의 기별을 선포한다. 레위기 23장에서 유월절은 안식일 바로 다음에 서술되어 있는 절기이며, 유대력의 첫 번째 절기이다(출 12:2). 참으로 유월절은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개의 기념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말해 준다.

  (39.1)
 어린양의 희생 제사는 페사흐, 즉 피로 구별된 가족을 천사가 “뛰어 넘은 것”[輸越]을 상징하며, 장차 올 구원의 소망을 새롭게 한다(7, 13절). 뼈를 꺾지 말라고 한 것은 부활을 가리킨다.2 무교병, 맛차(matzah)를 먹는 것은 그 백성이 본래 떠돌이였으며,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약속된 땅 뿐이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1절). 유대인의 전례문(典禮文)인 학가다(haggadah)는 대대로 “다음 해에는 예루살렘에서”(르샤나 하바아 비루샬라임[leshanah habaah birushalayim])를 반복한다. (40.1)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주의 마지막 페사흐를 기념하는 유카리스트(the Eucharist), 즉 성만찬에서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막 14:25)는 약속과 함께 동일한 예식적 문장을 반복한다. 그 약속을 후에 바울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이해하였다. “너희가 이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고대 그리스도교의 성만찬 예식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표명하는 마라나 싸(Marana tha), “오, 주여! 오소서!”라는 인사말로 마쳤음도 주목할 만하다.3 (40.2)
 일곱 교회
 미래와 현재 사이의 긴장은 이 예언적 이상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선지자는 “지금 있는 것과 장차 될 일”(계 1:19)을 보고 있다. 우리는 그 기별을 우선 요한 당대의 교회들에게 주신 것으로 읽어야 하며, 또한 예언적 관점에서는 장차 올 교회들에게 주신 기별로서도 읽어야 한다. 그 구절 자체가 이미 그러한 유형의 해석을 암시한다. 그것은 일곱 교회를 인자의 오른손에 잡은 일곱 별에 비교한다(16, 20절). (40.3)
  (41.1)
 고대의 사람들은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시한다고 믿었으며, 특별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미래를 예언하는 수단으로서 점성술이 인기를 끌었다. 성경의 저자들도 그러한 믿음에 대하 여 잘 알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은 욥기에도 나타나 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 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 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욥 38:31~33). 후에 유대교에서도 각 사람에게는 그에게 해당되는 천체인 맛잘(mazaal),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특정한 별이 있다고 믿었다.4 (41.2)
 하나님이 그분의 손에 별을 쥐고 계신 것도 그분이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점성술사들에게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의 하나님이 별들을 주관하는 신(神)이며, 따라서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 신다는 말이다.5 요한은 당시의 교회를 넘어 미래의 교회들을 가리키고 있다. 실로 그 수, 일곱은 그러한 해석을 확증해 준다. (41.3)
 아주 오래 전부터 7이라는 수는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수메르인, 바벨론인, 가나안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6 숫자 7을 전체성과 완전함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구·신약의 중간시대에 피타고라스(기원전 5세기)의 영향 아래서 숫자의 상징주의, 특히 숫자 7의 상징성은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7 계시록은 7을 포함해서 수의 상징을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신약에서 7이라는 수는 88회 나온다. 그 중에 56회가 계시록에 나타난다.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인, 일곱 영, 일곱 천사, 일곱 재앙, 일곱 뿔, 일곱 산 등이 그것이다. 그 책의 구조 자체를 요한은 숫자 7을 틀로 하여 만들었다. (42.1)
 우리는 일곱 교회를 엄격하게 문자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 수는 아시아에 있던 교회의 수를 그대로 센 것이 아니며, 그 수는 훨씬 많았다. 계시록에서는 신약에 언급되어 있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 두 교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8 실로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교회 전체를 대표하며, 기원후 3세기의 한 필사본도 그러한 해석을 입증한다.9 매 편지를 맺는 말인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0라는 구절도 더 많은 청중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 편지들은 모든 교회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누구나 그 내용을 통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은 두아디라에 보내는 넷째 편지에서도 명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모든 교회”(계 2:23)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42.2)
 일곱 교회는 그들이 선지자의 친숙한 환경(그는 거기 있어 보았고 그들을 알았다)의 일부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선택되었다. 지리적 위치로부터 예언을 이끌어내는 관례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미가는 미래에 관한 그의 이상 전체를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의 이름들로 엮어냈다.11 마찬가지로 다니엘도 그의 예언적 이상을 묘사하기 위하여 북방과 남방의 지리적·전략적 상황을 사용하였다.12 교회들이 언급된 순서도 지리적으로 여행자의 행로를 따랐다.13 (42.3)
 우리가 한 편지에서 다음 편지로 진행해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가 각 편지에서 점점 친밀해지는 것을 본다. (43.1)
1. 에베소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 2:1)
2. 서머나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8절)
3. 버가모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4. 두아디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5절)
5. 사데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계 3:3)
6. 빌라델비아 :“내가 속히 임하리니”(11절)
7. 라오디게아 :“내가 문 밖에 서서”(20절)
(43.2)
 그러나 우리가 예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편지들의 핵심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무대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장밋빛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다사다난 한 계시의 막이 오르면 그리스도교는 위기와 폭풍우 가운데 처하게 된다. (43.3)
 우리가 그 편지들을 읽어 나가노라면 목양적인 기별들과 함께 그 위에 예언적인 의미가 겹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은 요한 당대의 교회들은 물론(과거주의 해석),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면 누구에게나(관념론적 또는 상징주의적 해석)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43.4)
 이제 세 번째 천년기(즉 2000년대, 역자 주)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련의 예언들의 먼 지평선 위에 있는 것을 본다. 과거주의나 관념론적 해석에 더하여,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예언적(prophetic) 해석이 어느 때보다 더 적실(適實)하다.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