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2장—기독교 지하드8)
 흰 말
 어린양이 첫째 인을 떼시고, 흰 말이 등장한다. 그것은 정복과 승리의 상징이다. 로마의 장군들은 자신의 승리를 경축할 때 부대의 선두에서 흰 말을 타고 행진하였다. 선지자는 그 이상을 비슷한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 탄 자가 ∙∙∙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흥미롭 게도, 사자와 닮은 첫째 생물(계 4:7)이 흰 말의 비유를 불러들인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다. 지파의 사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함으로써 인들을 뗄 수 있는 권한을 얻었음을 상기하게 한다(계 5:5). 게다가 그는 승리의 “면류관”(스테파노스 [stephanos])을 받는다. (84.3)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동일한 이미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묘사하기 위하여 다시 등장한다. 거기서 백마를 탄 자도 역시 면류관을 쓰고 있다.(11~16절). 그러나 그 문맥에 나오는 면류관은 왕의 면류관(디아데마[diadema])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분의 나라의 도래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단순히 승리하였을 뿐, 아직 왕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문에서 그 기사(騎士)는 출발하고 있는 것이지 도착한 것은 아니다. “[그가] 나가서”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시작하는 데 불과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시대(1~3세기)를 보고 있다.

  (84.4)
 교회는 아직 타협, 정치 그리고 폭력에 대하여 비교적 순수함을 지키고 있다. 예수님의 신선한 승리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아직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분은 피흘림을 통하여 그의 승리를 획득하지 아니하였다. 승리의 면류관(스테파노스)는 “받[은]” 것이다. 위로부터 받은 은혜이다. 그 기사는 활은 가졌으나 화살은 없다. 그의 승리는 평화적인 것이다. (85.1)
 붉은 말
 소와 닮은 생물이 소개를 따라 둘째 인을 뗄 때에 붉은 말이 풀려난다. 그 기사는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계 6:4). 그는 “큰 칼”을 받는다.

  (85.2)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제 평화에서 전쟁으로 변화를 겪는다. 그 문맥은 박해가 아니라 상호간의 학살을 의미 한다. 말의 붉은 색은 쏟아진 피의 색과 흡사하며(왕하 3:22을 보라), 소(송아지)는 도살(屠殺)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고(눅 15:27), 칼은 다가오는 학살을 예고한다. 같은 단어인 마카이라(machaira)는 에녹 1서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이스라엘은 이교도들과 싸우고 그들을 죽이기 위한 “큰 칼”을 받는다.27 (85.3)
 교회는 아리우스 주의자들에 맞서서 그 지상권(至上權)을 다툰다(4~5세기), 처음으로 황제들이 정치·군사적으로 교회를 지지한다.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기원후 306~337) 그리고 나중에는 프랑크족 황제인 클로비스(기원후 481~511)가 그것을 위하여 싸웠다. 그 기간에 “박해 당하던 교회가 국교와 승리의 지위로 올라섰다(혹은 하락하였다)”고 쉴 이사크(Jules Isaac)가 말한 바로 그 시대였다.28 (86.1)
 검은 말
 셋째 인은 암흑의 장면을 배경으로 열린다. 검은 말이다. 그 위에 탄 사람은 식량을 달아보기 위한 저울을 손에 들고 있다. 에스겔이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겔 4:16)라고 표현하였 듯이 그것은 기근의 상징이다.

  (86.2)
 기근이 전쟁을 뒤따르듯, 검은 말은 붉은 말을 뒤따른다. 네 생물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은 어린양의 음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분 역시 “보좌와 네 생물 ∙∙∙ 사이에”(계 5:6) 자리 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으신 심판자의 음성은 어린양의 음성으로서, 공의와 은혜가 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음성은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말라고 명령한다(계 6:6). 대개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밀이나 보리에 비하여 뿌리가 더 깊기 때문에 가뭄을 더 잘 견딘다. 더욱이 곡식, 기름과 포도주는 이스라엘 땅의 세 가지 주요 농산물로 묘사된다.29 인간의 얼굴을 가진 셋째 생물의 등장은 이미 그러한 해석을 암시하였다. 그것은 다른 세 짐승에 그려진 자연적이고 비종교적인 면에 비 하여 영적인 차원을 묘사한다(단 4:16, 34을 보라, 참조 7:8, 13).30 그러므로 그 기근은 영적인 가뭄을 상징한다. 게다가 곡식, 포도주 그리고 기름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86.3)
곡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31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32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33
(87.1)
 기근과 가뭄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영향을 미칠 뿐, 성령과 예수님의 피는 보존된다. 언약의 양측인 인간 편(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편(성령과 예수님의 피) 중에서 인간 편에만 기근이 손댈 수 있다. 인간의 편을 보면, 교회는 그 소명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그 교인들의 영적·신학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백성은 영적으로 양식을 얻어먹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연구를 무시하고, 깨달음은 제한된다. (87.2)
 하지만 하나님 편을 보면 성령의 영향과 예수님의 피의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여전히 작용하고 있으며 치유의 향유를 제공한다. 흥미롭게도, 고대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였다.34 그 상징의 의미는 풍부하고, 포도주와 기름의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성경의 상징은 자주 이런 방식으로 기능한다. 포도주와 기름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활동을 묘사하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스스로 입힌 상처에 향유가 된다. (87.3)
 셋째 인의 예언은 역사상 교회가 하나의 제도적 기관으로 자리잡는 일에 너무 몰두하여 그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망각하고 있던 시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곡식”을 저울에 달아서 사야 하는 것은 이처럼 물질적인 부(富)에 몰두해 있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지만 곡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교회가 물질에 사로잡힌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겪는 기근이 바로 그것이다. (87.4)
 이 기간에 교회는 고유의 영토를 직접 소유한 정치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제 막 아리우스파로부터 해방되었고(기원후 538), 교회는 그 영토를 점유하였다. 나중에 Y. 콩가르(Congar)는 말하기를, 교회는 “수직적인 성직자 계급제도”를 위한 기초를 놓았고 “결국은 권력의 신정(神政) 정치”를 확립했다고 하였다.35 역사는 그레고리우스 대제(590~604 교황)를 “정치적 · 종교적 직무를 모두 축적한” 최초의 교황으로 간주한다.36 (88.1)
 교회는 물질적 · 정치적으로 더 번영할수록 영적으로는 더 가난해져 갔다. 제도 자체와 그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을 점차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스스로 세워 가려고 하는 교회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된다. 교회가 그 구조물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 웅장함과 호화로움을 더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은 영적인 빈곤에 빠져들곤 하였다. 내용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형식이 지배할 때 절대적 기준,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한 위험이 있다. 교회는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진리의 기준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도그마가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고, 압제와 불관용이 밀려들어오는 문을 열었다. (88.2)
 청황색 말
 넷째 인을 떼자 죽음과 공포를 암시하는 창백한 색(클로로스[chloros])의 말이 등장한다. 이 말에 앞서서 성경에서 박해와 죽음을 상징하는 육식 조류, 독수리37를 닮은 생물이 나온다. 교 회는 이제 가장 흉악한 모습으로 죽음의 화신이 된다. 계시록에서는 그 기사(騎士)를 “사망”이 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음부(Hadēs, 죽은 자들의 처소)라고 부르는 또 다른 기사가 바로 그 의 뒤를 잇는 광경을 보여 준다. 70인역에서는 죽은 자들의 장소 또는 상태를 뜻하는 히브리어 스올(sheol)을 번역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계시록은 자주 “사망”“죽은 자들의 처소”라는 두 말을 결합시킨다.38 이 마지막 재앙은 다른 모든 재앙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능가한다. 칼과 기근은 죽음을 초래한다. “땅의 짐승”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죽음에 대한 언급을 더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성경은 자주 죽은자의 처소인 스올을 들짐승이 거하는 곳으로 묘사한다.39

  (88.3)
 그 기간은 역사상 교회가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들 모두를 박해하는 압제자가 된 시대이다. 우리는 십자군, 이단 심문 그리고 종교 전쟁의 시대로 들어 간다. 지평선 위로 희미하게 교회의 “경멸의 가르침”40으로 양육을 받은 나치의 압제의 그림자가 보인다. 청황색 말은 또한 그 교활한 살인수용소들과 함께 홀로코스트10)를 연상케 한다.

10) 문자적으로는 “전체를 태운다”는 뜻으로 레위기의 번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역자 주).
(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