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2장—기독교 지하드8)
 이러한 해석은 좀 거슬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의 반(反) 셈족적인 분노는 교회에 의해 열여덟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명예 훼손과 박해의 연장(延長)일 따름이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에 대한 교회의 보복 사업을 자신이 양도 받아 끝을 맺을 것이라고 두 명의 가톨릭 주교에게 진지하게 선언하였다.41 그리고 쇼아(Shoa, 나치의 학살)가 교회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치더라도, 그 종교적인 정책의 결과로 남아 있다. 교회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암묵적으로 연루되어 있었음을 알고 있다.42 그러므로 넷째 말은 교회의 지하드의 절정을 묘사한다. (89.2)
 교회의 세계 정복은 평화적인 승리로부터 시작되었다. 흰 말의 등장으로 막이 올랐고, 그 기사인 그리스도 예수는 빈 활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둘째 말부터는 그 힘이 폭력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싸웠던 반면에,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종교 전쟁과 십자군 원정들은 교회의 정신에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한다. 아래로부터의 행동이 위로부터 내리는 계시를 대신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행동할 특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관용은 늘 이런 찬탈의 정신으로부터 생겨난다. 하나님의 증인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할 때, 성공이 위로부터 내리는 계시를 지워 없앨 때, 제국주의적 정신이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을 대체할 때, 통계와 침례 숫자가 회심의 진정성보다 우세할 때, 교회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령의 지도 대신에 전략과 마케팅 계획에서 찾을 때 그러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안전감에 대한 욕구는 항상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겸손하게 신뢰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업적을 이루는 데 성공하는 것은 교만과 불관용을 초래할 뿐이다. (90.1)
 폭력과 압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역할을 찬탈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다. 십자군으로부터 강제 수용소까지, 매번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여서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웠으며, 고트 미트 운스(Gott mit uns)”11)라는 구호를 위하여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였고, 그들이 하늘을 향하여 정의를 부르짖은 외침은 아직도 우리의 귀에 울린다.

1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독일어이다(역자 주).
(90.2)
 희생자들
 다섯 째 인은 전환점을 기록한다. 첫 네 인을 뗄 때는 각각 네 생물의 “오라”는 신호에 맞춰서 네 말이 나타났었다. 다음 세 인을 뗄 때는 더 이상 말들을 볼 수 없다. 예언적 이상은 직접 예언적인 사건들에 관련이 될 것이다. (90.3)
 역사의 희생자들의 외침이 다섯째 봉인을 산산조각 낸다. 이제 압제자로부터 희생자에게로 관점이 옮겨져 있다. 짓 밟힌 남녀들의 신음이 정복하고 압제 하는 말들의 발굽 소리를 대신한다.

  (91.1)
 희생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두 개의 질문만이 의미가 있다. 왜? 그리고 어느때까지? (91.2)
 첫 질문은 의로운 희생자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희생자들에게는 울부짖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계 6:9) 고난당하고 있다.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풀무불에 던져진 히브리 사람들의 부르짖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짐승이 포효하는 경기장 안으로 던져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짖음, 성경을 펼쳐서 위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진리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감옥이나 불 속에 던져진 그리스도인 추방자들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세로부터 우리의 시대까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옛날부터 섬기는 하나님을 증거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명예를 훼손당하고, 압제받고, 추격을 당하며, 학살당하고, 가스로 사형을 당한 유대인들의 부르짖음이기도 하다. (91.3)
 하나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계시록의 희생자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었다. 본문은 그들의 죽음을 홀로코스트, 즉 번제단 위의 희생제물(레 4:7)로 묘사하면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영혼들은 아벨의 피가 그랬듯이(창 4:10) 하나님께 신원(伸寃)해 달라고 부르짖는다. 계시록은 그들이 당하는 고난의 희생적인 성격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레위기의 언어를 빌려오는데, 거기서 피는 목숨과 동일시 된다(레 17:11). 순교자들의 피는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간과하실 수 없다. 정의는 실현될 것이다. (91.4)
 선지자는 희생자들의 구원 뿐 아니라(그들은 흰 옷을 받았다) 박해자들이 당할 보복에 대해서도 보증한다. 구원은 공의를 내포한다.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셔야만 한다.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그분의 공의를 손상시키기까지 한다. 종교가 감정이나 영성의 수준으로 졸아들어서 그들은 구원의 역사적인 반격을 망각한다. 그러나 짓밟힌 희생자는 다른 관점을 가진다. 친절한 사랑의 말, 아름다운 미소, 자선심으로는 부족하다. 희생자를 그의 고통으로부터 끌어내는 구조의 손이라야 실제로 의미가 있다. 억눌리는 사람들에게는 점잖은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구조 받는 데에만 몰두해 있으며, 결국 “어느 때까지?”라고 부르짖기에 이른다. (92.1)
 종교적인 경험의 위로나 과거의 하나님 또는 현재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조차도 정의를 찾는 탄원을 침묵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현실 속에 개입하시도록 요구한다.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 심판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것을 시간 속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기다린다. 하나님의 심판을 애타게 기다리는 동일한 부르짖음이 시편에서도 공명(共鳴)된다.43 그러나 다니엘에 나오는 부르 짖음(단 8:13)44이야말로 본 구절에 대한 가장 강력한 메아리이다. 다니엘에서도 그 부르짖음은 핍박당하는 성도들의 소리이며(단 8:12) 하나님의 심판으로 귀결된다. (92.2)
 다니엘의 “어느 때까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천사는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 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단 8:14)고 대답한다.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일은 대속죄일, 즉 킵푸르(Kippur)45를 암시하며, 그 날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을 경축한다. 이는 다니엘 7장의 해당 구절에 따르면,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이는]” 순간이다(단 7:10). (92.3)
 다섯째 인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심판 장면 위에 개봉된다. 하지만 이 이상에 의하면 그것은 아직 고통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계 6:11) 미뤄진다. 구원이 실효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거기 있어야 하며, 그러한 개념은 성경의 전체성의 원칙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다른 이들이 없이 한 사람만 구원하지 않으신다. 한 개인의 구원은 필연적으로 온 세계의 구원을 수반한다. 구원은 우주적 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구원은 불가능하다. 공의의 나라에는 다시 성결하게 하는 일, 즉 재창조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킵푸르의 근본적인 교훈이다.46 (92.4)
 하나님은 단지 은혜와 실존과 신비적 경험의 주님이 아니라, 공의와 거룩함의 하나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10절)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언급을 이미 빌라델비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계 3:7). 게다가 이 두 이상은 바로 빌라델비아라는 이름 안 에도 내포된 아델포이(adelphoi), 즉 “형제들”(계 6:11)이라는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암시는 본 단락을 역사상의 한 시대와 연결시키는 일을 도와준다. 참으로 그 두 단락은 동일한 시대에 해당된다. 우리는 19세기에 와 있다. (92.5)
 그 예언의 역사적인 의미는 흥미롭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영적이고 영원한 진리에만 제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희생자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은 고난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다. 그것은 압제당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 위하여 개입하는 공의와 짝을 이룬다. (92.6)
 우주적 혼돈
 짓밟힌 희생자들의 신음소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 앞에 떠는 압제자들의 공포에 걸린 비명이 응답한다. 여섯째 인의 개봉은 하나님의 공의의 이면을 보여 준다. 다섯째 인에서 우리는 신원을 부르짖는 희생자들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다(계 6:10). 그 심판은 희생 자들에게 “흰 옷”을 입혀 주는 구원과 은혜의 사건이었다. 이제 심판은 격노함으로 압제자들을 향한다. 이 두 모습은 상호 보완적이며, 구원의 양면이다.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다시 창조하셔야 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의 멸망이 필요하다.

  (92.7)
 인류의 죄는 온 우주에 반향을 일으켰었다. 창조의 사건은 이미 인간과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의존을 암시했다. 인간과 자연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아담의 불순종의 영향은 자연에 미쳐서 가시 덤불과 잡초가 자라났다. 인류 첫 세대의 죄악은 대홍수로 귀결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거민들의 배역(背逆)은 그들을 유황불에 사르게 하였다. 가나안 땅은 그 거민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토해냈다. (92.8)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상호 의존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모세,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는 모두 세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상기시켰다. 죄는 식물, 동물, 시간, 산들과 특별히 남녀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은 땅을 흔들고 낮의 광명을 절망의 흑암으로 바꾸었다. (92.9)
 모든 범죄는 반(反)인류적이고 반우주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진노가 향하게 하시는 것이다. 선지자의 눈은 이러한 진노를 우리 문명의 아주 핵심에까지 추적하고 있다. 마지막 때는 두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