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배(586 B.C. 이후): 성전과 도시가 파괴되었고, 왕과 백성들은 바벨론에 있다. 사무엘상․하의 저자와 그의 독자들의 관점으로서 그들은 그들에게 가깝고 귀하던 것을 다 잃은 심한 충격 속에 있다. (240.2)
 3. 유배 후(400 B.C.): 소박한 성전만 있고, 왕도 없다. 역대기의 저자와 독자의 관점으로서, 냉혹한 모습이지만 아직도 약간의 희망은 살아 있다. (240.3)
 4. 기독교적 의미(A.D. 100): 세계적 공동체, 영적 왕국, 영원한 왕. 예수를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 영접한 자들의 관점. 이를 통해 그들은 다윗에게 준 약속의 문자적 의미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240.4)
 5. 기독교 후의 유대교적(현대) 의미: 그 땅과 그 도성으로 돌아가자. 어쩌면 성전도, 어쩌면 메시야도 있을 것이다. 유대교 일각의 견해로 유대교 내의 다양한 단체들에 의하여 여러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240.5)
 우리의 주된 초점은 사무엘상․하의 저자의 관점인 둘째 관점에 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 즉 첫째 관점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셋째와 넷째 즉 역대기와 기독교적 관점에도 합당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240.6)
 다윗이 권좌에 오른 놀라운 이야기 뒤에, 사무엘상․하의 저자가 한 것처럼 나단의 계시와 다윗의 기도를 경험하려는 것은 방금 선거전에서 패배한 후보자의 선거 공약을 다시 읽는 것과 같고, 지금은 이혼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때 행복했던 결혼 시절의 사랑의 편지를 다시 읽는 것과 같다. 더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욥이 옳은 말을 했고, 그의 친구들은 어리석음을 말한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의 고상한 발언에서 욥의 화난 말을 골라내려는 것과 같다(욥 42:7-9). (240.7)
 최근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룩 골드스틴(Baruch Goldstein)의 두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브루클린(Brooklyn) 태생의 의사로서, 1994년 2월 헤브론의 회교 사원에서 48명의 팔레스티니안들(Palestinians; 이스라엘 국내에 살고 있는 아랍계의 사람들-역자 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나 그는 24년 전 1970년에 초등학생으로서 이렇게 썼다: “누가 이와 같은 상황-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살며, 이웃을 살해하지 않고, 이웃의 토지를 탐내지 않는 상황-이 생기도록 조처할 것인가?”(Newsweek, 1994. 3. 21). (240.8)
 유배 상황에 처한 우리에 대하여 상상하기도 힘들거니와, 그 관점에서 다윗을 위한 나단의 영광스런 말과 다윗의 감사에 찬 반응을 “듣는” 것도 쉽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사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말씀으로 듣게 하실 것이다. (241.1)
 제7장의 개관
 다윗은 자기의 화려한 궁과 여호와의 초라한 장막을 비교하고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짓고 싶다고 말하였다. 선지자 나단은 그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하셨다—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분에게는 전이 전혀 필요없다. 그러나 그분께서 다윗의 집을 세우실 것이다. 다윗의 아들이 여호와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지을 것이다. 만일 아들이 곁길로 나가면 여호와께서 그를 벌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을 앗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의 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241.2)
 그에 반응하여 다윗은 여호와를 위한 집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집안이 계속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놀람과 감사를 표현하고 여호와께 자기 집안을 축복하시라고 구한다. (241.3)
 나단의 계시(7:1-17)
 다윗의 제안에 대한 나단의 반응은 참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고 여호와의 직접적인 말씀에 따라 반대의 기별을 전하는 가장 명백한 성경상의 예가 된다. 그러나 이 경험이 예외라기보다는 늘 있는 일일 가능성이 있다. 선지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상을 통해서나, 어떤 종류의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스런 표출을 통하여 그들의 신임장을 받는다. 그렇게 인가를 받은 후에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러나 늘 이상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최선의 판단과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시대의 의미를 풀어준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4:1-8). 그들 곁에 계시고(렘 1:19), 그들을 정결케 하시고(사 6:7), 그들을 도와 말하게 하신다(출 4:12; 렘 1:9).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그러하였듯이 선지자는 적군에 대한 저항을 권할 수도 있다(사 37:6, 7). 혹은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그러하였듯이, 선지자는 항복을 권할 수도 있다(렘 38:17, 18).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이, 선지자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기별을 전할 수도 있다-“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더라”(렘 36:32). (242.1)
 사무엘하 7장에서 나단이 “잘못 말했고,” 여호와께로부터 온 더 자세한 교훈에 의해 그것을 바로 잡았기 때문에 다윗이 선지자의 권위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켰다는 암시가 없다. 참으로, 여호와의 백성을 위한 목회적 관심—왕을 포함하여—은 다윗의 선한 동기에 대한 나단의 원래의 인정은 “옳은” 기별이었다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다. 선지자에게 확인을 이미 받은 후에, 다윗은 “수정안”이 왔을 때에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242.2)
 여호와께로부터 와서 다윗에게 준 나단의 계시 속에는, 첫 부분(7:5-7)에 여호와께서 다윗이 자신을 위하여 전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도 필요 없었고, 지금도 필요 없다. 장막이 매우 적당하다. 우리의 저자는 유배된 그의 독자들이 여호와께서는 성전이 없이도 잘 지내실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를 바랬던가? 성전은 사라졌다. 아마도, 사라진 채로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242.3)
 나단의 계시는 다윗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윗이 직접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논지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에 대하여 지시하는 말 속에 역대기 기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대상 22:8). (243.1)
 다음 부분(7:8-11)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그의 집에 주시기로 한 구체적인 혜택을 기술하고 있다. 다윗 당시에 그 약속들은 그럴듯한 것이었고, 대부분 이미 그들에게 주어졌다: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갖고 있으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악인들이 그들을 더 이상 압제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방의 원수들로부터 “평안”을 주실 것이었다. 물론, 유배는 그런 모든 약속들을 혼돈 속에 처넣어버렸다. 그러나 사무엘하의 기자는 개의치 않고 독자들이 숙고하도록 그것들을 다 기록하였다. (243.2)
 마지막으로 나단은 다윗 집안이 계속될 것을 확정한다(11b-16절). 여기서 역시 여호와를 위한 집이란 유일한 언급이 나온다. 비록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고 그 집은 다윗의 아들에 의하여 건축될 것이다. 다윗의 집, 나라, 왕위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나단은 세 번이나 이것을 반복한다(13, 16절). 다윗 시대에 그것은 좋게 들렸다. 그러나 유배 기간 동안에 그것은 어떻게 들릴 것인가? 이미 집과 나라와 왕위가—성전 곧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과 함께—다 사라지고 말았는데! (243.3)
 다윗의 기도(7:18-29)
 다윗의 기도의 첫 줄은 유배중의 독자들에게는 고통스럽고 풍자적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18절). 어디까지? 유배지까지?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약속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8절). (2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