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자기 집에 복을 주시라는 요구로 그의 기도를 끝낸다. 그런 축복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지 않았다. 이미 주지한 대로, 구약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의 직접적인 복을 받았다고 언급된 집은 오벳에돔의 집밖에 없다(Polzin, David, 65). (244.1)
 뒤 이어 나오는 장들은 다윗의 집이 복을 받기보다는 저주를 받았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집안이 여호와의 저주의 본보기로 대대로 보존된 첫 번째 경우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엘리의 집을 생각해 보라: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삼상 2:30). 그런 집을 어떻게 여호와께서 벌하실 수 있을까? 말살시킴으로가 아니라, 계속적인 고통과 아픔으로. 엘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 단에서 내가 끊어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33절).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기별 속에 기술된 운명이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일렀다(삼상 3:13). (244.2)
 요압에 대한 다윗의 저주도 그와 비슷하게 “영영히” 계속되는 형벌을 가리켰다: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삼하 3:29). (244.3)
 그것은 다윗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폴친은 이렇게 말한다: 사무엘하 7장에 언급된 여덟 번의 ‘영영히’의 바로 다음에 나오는 ‘영원토록’이 다윗의 집에 대한 영원한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David, 81). 그 말씀은 사무엘하 12:10에 나온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시 폴친은 이렇게 말한다: “그 집이 영원히 남아있지 아니하면, 칼이 영원히 그 집 위에 머물 수 없다”(David, 81). (244.4)
 다윗에게 준 약속에 대한 그 같은 끔찍한 견해는 물론 단지 한편의 관점에 불과하다. 역대기의 저자가 같은 역사를 반복하여 이야기할 때에, 그는 더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다윗의 집을 치고 왕국의 몰락을 가져온 혼란을 말하는 많은 저주스런 정황을 누락하거나, 축소시켰다. 역대기의 기자는 분명히 다윗의 집에 주어진 “영원한” 약속들이 살아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예수의 기별과 봉사에 의하여 이루어질 궁극적 변화를 위해 준비하게 하였다. 그 변화는 오직 예수 외에 다른 왕이 없는 공동체, 모든 인류가 형제요, 자매요, 모두가 그 안에서 하나인 공동체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245.1)
 혁명적이라고? 그러나 사무엘상∙하의 저자는 그 이상(理想)을 멀리서 훔쳐보았다. 아마도, 그가 왕국의 비극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악한 결과에 너무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이상을 뚜렷이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다윗 왕국의 약속들을 변경시키는 대신에, 그는 그것들을 끝없는 고통의 약속으로, 즉 떠날 줄 모르는 칼로 보았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기별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복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유혹이 올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경고이다. (245.2)
 전쟁의 사람(8:1-18)
 제8장은 다윗의 군사적 공적의 요약이나 본보기처럼 보인다. 아마도 연대순으로 정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Anderson, 130). 이 목록은 그의 통치 기간을 통틀어 이루어진 승리들을 열거한 것일 수도 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본 장은 나단의 계시의 몇 가지 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악한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을 더 이상 “해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모든 원수들로부터 놓여나는 “평안”을 주셨다(7:10, 11). 역대상 18장에서 사무엘하 8장과 평행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다수의 사소한 변경과, 첨가와 삭제와 함께. 가장 눈에 띄는 삭제는 모압의 삼분의 이를 다윗이 잔인하게 처형한 기록이다(삼하 8:2). 역대기의 저자는 다윗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것을 꺼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다윗이 하닷에셀의 병거의 말들의 힘줄을 끊은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8:4; 대상 18:4). (245.3)
 역대기의 저자는 솔로몬이 다윗이 모아둔 놋을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을” 위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할 때에 사무엘하 8장을 보충한다(대상 18:8). 그는 사무엘하 8:4과 다르게 말한다. 그곳에는 하닷에셀로부터 1,700명의 기병을 잡았다고 말한다; 역대상 18:4에는 1,000의 병거와 7,000의 기병이라고 되어 있다. 역대기는 다윗이 아니라 아비새가 18,000의 에돔인을 죽였다고 말한다(삼하 8:13; 대상 18:12). 마지막으로, 사무엘하 8:18은 다윗의 아들들이 “대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역대상 18:17은 그들은 “왕을 모셔 대신이 되니라”고 말한다. (246.1)
 사무엘하 8장에서 숨겨진 그리고 드러난 피흘림의 의미에 관하여, 실제적으로 생각하자. 다윗이 영국 신사처럼 행동했기를 우리가 바란다고 해도 그의 시대의 폭력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그가 모압 사람들에게는 평상시보다도 더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다윗 자신도 룻을 통하여 모압의 일원이었다(룻 4:17; 마 1:5). 그리고 그가 사울 왕을 피해 다닐 때에 모압 왕에게 그의 부모를 얼마동안 맡겼다(삼상 22:3, 4). 그러나 모압에게 잔혹했다면, 다윗은 에돔 사람에게는 더 심하게 하였다. 열왕기상 11:15, 16에 의하면, 다윗과 그의 군대가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기까지 6개월간 에돔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그러한 습격은 신명기가 모압과 암몬에 대하여, 그리고 에돔에 대하여 대조적인 처리를 명한 것을 통해 볼 때에, 특히 거슬리는 대목이다: “암몬 사람이나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 그러나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7절). (246.2)
 역대기 저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내용과 대조적으로, 사무엘상․하의 저자는 다윗의 역사의 더 흉한 면을 포함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윗과 솔로몬을 포함한 모든 왕들이 철저히 인간이며, 왕정이란 잘못된 기관에 그들이 참여함으로 일을 더 그르쳐 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전체적인 동기에 맞는다. 그러나 여기서 모압에 대한 잔인성을 자세히 기록하고 열왕기상 11장에서 에돔에 관하여 기록한 동기가 다윗의 경험의 어두운 면을 교묘히 드러내려는 데 있었는가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사무엘하 8장의 이야기의 결론은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15절). 만일 먼저 암시된 것처럼 요압이 아브넬을 암살한 것에 대하여 다윗이 공의대로 하지 못했더라도, 여기서 사무엘하의 저자는 다윗이 왕으로 행한 것들이 “바르고” “옳은” 것이었다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두 단어는 시편 72에 나오는 이상적인 왕을 묘사할 때에 두 번이나 반복된 단어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시 72:1, 2). (246.3)
 역대상 18:14의 평행 기사가 동일한 단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역대기 저자와 사무엘하의 저자가, 왕궁 문서철에 기록을 남긴 이전 저자의 의견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무엘하의 저자는 다윗 통치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을 수용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247.1)
 다윗의 행정 기술과 관계하여, 8장 끝의 주요 관리들의 명단이 세 쌍을 포함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두 군사령관(요압과 브나야), 두 제사장(사독과 아히멜렉), “국무성”에서 둘(여호사밧과 스라야). 앤더슨은 이렇게 이해한다: “만일 이 이중 구조가 의도적인 것이라면, 그 목적은 한 사람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리라!”(Anderson, 136). (247.2)
 므비보셋 (9:1-13)
 나의 교육자 생활 속에서, 학생들이 잘 알려진 성경 이야기의 연대적 지리적 내용을 모를 때에 나는 자주 난감함을 느낀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인물들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하여 매우 막연한 생각밖에 없다. (248.1)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역사 중에서 뿌리 없이 떠다니는 “섬들” 중 하나다. 그것은 단지 작은 소년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소년은 급히 도망가던 유모가 떨어뜨려 불구가 되었고, 나중에 다윗 왕이 큰 친절을 베풀어 그를 돌보았다. (248.2)
 그러나 그것은 한편의 멋진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약속과 성실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사무엘상∙하 전체를 고려한다면, 연대기와 지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이 이야기를 어디에 끼워 넣었는가도 중요하다. (248.3)
 므비보셋의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하자면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과 사울의 집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본인의 경향을 이 자리에서 밝혀야 하겠다. 내가 사무엘상∙하를 연구하면서 요나단이라는 인물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 그야말로 “선한” 인물에 가장 가깝게 보인다. 그가 사무엘상 14장에서 처음 나타났을 때에, 그는 젊었고, 수줍은 무사였고, 몰래 진영을 빠져나가서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치는 데 자기를 쓰시는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하여 일하실까 하노라”고 그의 병기 든 자에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여호와께서 요나단의 단순한 믿음을 쓰셔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248.4)
 그가 모르고 자기 아버지의 미련한 맹세를 어겼을 때에, 요나단은 그것을 인정하고 값을 치르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그를 변호하였다(45절). (248.5)
 그가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직후인데, 다윗을 경쟁자로 보는 대신에 요나단은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다윗에게 그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다(삼상 18:4). 사울이 그의 부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했을 때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알렸고, 사울과 맞섰다. 결국 그의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맹세하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삼상 19:6). (2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