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387.2)
에스더가 백성들을 대표하여 왕 앞에 나아갔을 때 백성들은 왕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가치 있게 여겼다면 그들이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와 함께 금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387.3)
에스더는 왜 금식을 했는가? 갑작스러운 금식이 왕에게 더 사랑받을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남성들은 적당히 통통한 여성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없지만 에스더가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기를 탄원하는 심령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스더는 그녀의 기도와 자기 백성들의 기도가 함께 동반되기를 원했다. (387.4)
에스라 8장에서는 자신을 겸비케 하거나 혹은 금식함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특별히 도움이 필요할 때의 기도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에스라와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의 유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려 했을 때 에스라는 말하기를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1절)라고 하였다. (387.5)
시편 35:13, 14 또한 도움이 필요한 특별한 시기의 기도를 금식과 연관시키고 있다. 시편기자는 옛 친구들의 아픔에 큰 슬픔을 나타냈고 그들을 위해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며, 기도하고, 엎드리고, 울음으로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388.1)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해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다니엘 9:3이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다니엘 9장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가 백성들의 죄와 그들에게 임한 멸망으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슬퍼하는 것 또한 금식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메뚜기 재앙이 온 나라를 삼키는 위기의 시기에 선지자 요엘이 백성들을 모아 기도와 금식으로 회개하라고 외쳤다(욜 2:12~17). (388.2)
다니엘 10:2~3은 또 다른 자기부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완전한 금식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분명 무엇인가를 섭취했는데 그것은 소박한 음식들이었다. 또한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기 위한 기름을 멀리 했다. (388.3)
다니엘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하여 하늘의 존재가 그에게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388.4)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 10:11~12).
(389.1)
하늘의 존재가 그대를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보라!! 다니엘은 애통해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케 함으로써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이해를 얻기 위하여 전념하였다(참고 단 9:2~3). 그는 하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지상의 안락을 버렸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389.2)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속죄일에 왜 자신을 괴롭게 하며 마음을 겸비케 하였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이 시간은 특별한 필요의 시간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을 제쳐 놓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완전히 전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먹을수 있는 음식이나 음료수가 없었고 자신들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제사장의 사역에 완전히 의지했다. (389.3)
사람들은 이미 용서받지 않았는가? 왜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만일 그대가 의롭다고 선언되었다면 왜 상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죄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한 죄 때문에 뿌려져야 했던 피로 말미암아 성소는 정결케 되었다. (389.4)
우리가 용서받을 때에 우리의 과오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르셔야했던 대가를 깨달아 우리의 죄의 흉악성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사람은 “내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 (390.1)
희생 제물을 가져오면서 그들은 이미 죄에 대하여 슬픔을 보이지 않았겠는가? 왜 또다시 이 모든 슬픔들을 되살려야 하였는가? (390.2)
대속죄일에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죄를 슬퍼했는가? 용서함을 받은 경험은 지속되었는가, 아니면 피상적이었는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되돌아가기를 원했는가? (390.3)
이 질문들의 요지는 사람들이 절망적인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비굴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390.4)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그와 함께 “마음”의 관계를 가지길 원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5~6). (390.5)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될 때를 예언했다. (390.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1~34).
(390.7)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줄곧 이러한 경험들을 하기 원하셨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새 언약” 이라 불렀다. (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