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8부 제단으로의 초청 제43장 대속죄일의 심판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그의 법을 마음에 새기고 그와 완전히 연합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법을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기지는 못한다. 그들이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391.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는 나를 알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도덕적인 품성인 사랑이기 때문이다(요일 1:8; 마 22:36~40). (391.3)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경험에 기초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 , 우리는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3)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했을 때에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한 만큼 깨끗한 상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다. (391.4)
 우리는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상태에서 이 여정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한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392.1)
 예레미야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다(렘31:34). 죄를 잊으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그분의 용서가 지속된다. 기억되지도 않는 죄에 대한 용서를 어떻게 철회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392.2)
 그러나 죄가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용서는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보라. 불의한 청지기가 그의 동료를 용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이미 용서해준 주인은 그의 대한 용서를 철회했다. 주인은 용서해 주었지만 그는 죄를 잊고 있지 않았다(마 18:23~35). (392.3)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잊으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용서 받은 죄를 영원히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므로 다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392.4)
 이스라엘 성소에 있어서 속죄의 두 가지 측면은 죄를 용서하는 것과 영원히 도말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죄인이 희생제물을 가져왔을 때 죄인은 용서함을 받았다(레 4). 그러나 죄가 성소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와 전혀 상관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속죄일 의식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 함을 받았다(레 16:30). 대속죄일을 통하여 도말된 그들의 죄는 다시 하나님과 그들과의 연관될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없었다. 용서는 더 이상 철회될 수 없게 되었다. (392.5)
 예레미야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기억치 아니하신다. (393.1)
 죄를 영원히 무관하게 하는 것은 용서를 받은 이후의 삶에 달려 있다. 불의한 청지기는 용서받은 이후의 삶의 태도 때문에 받은 용서함을 잃어버렸다. 죄로부터 “정결” 케 되기 위하여 이미 용서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므로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보였다. (393.2)
 대속죄일 심판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하다” 선포하심은 “흠이 없다” 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심판의 시기를 지나 하늘 시온 산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충성심을 지킨 사람들은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 14:5; 참고 7:14). 그들은 심판의 끝에 이미 정결케 되고 흠 없이 되었다. (393.3)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죄일 모든 기간 동안 스스로 겸비케 하고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 회개와 통회를 나타내었다. 이것은 일 년 중 단 하루였다. 분명 우리는 1844년에 시작된 마지막 심판의 모든 기간 동안 금식하며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지막 때에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자신을 겸비케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회개를 나타내며 예수의 믿음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계 14:12). (393.4)
 하나님의 계명은 일주일 중 하루인 안식일에 모든 것을 금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출 20:8~11). 이것은 창조주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율법에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재창조의 표징이다(31:12~17). 거룩하게 된다는 것, 즉 성화된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신학적이거나 또는 신실한 척하거나 미혹적인 신실함이 아니다. (393.5)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394.1)
 거룩하게 되는 것과 “흠이 없게” 되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자라나는 것이다. 선지자 말라기는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가족 간에 화해를 위한 호소가 있을 것을 예언함으로 그의 책을 마치고 있다(말 4:5~6). 오늘날 온갖 세력들이 가족들의 마음을 서로에게서 분리시키고 있는 이 때에 이 말씀이 실제적으로 와 닿는다. (394.2)
 성화의 여정 속에서 장애물은 삶의 작은 부분들을 포함한 실천 단계에서 만나게 된다. (394.3)
 사소한 것들! 그것들이 나의 연약한 부분이다. 스스로에게 큰 도전을 허락해 보라. 그러면 나는 그것들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자극과 방해들은 나를 훨씬 더 쉽게 넘어뜨릴 것이다. (394.4)
 하나님의 율법이 단순히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열 개의 계명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출 20) 나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라는 말로 웬만큼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참고 눅 18:21).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찾아다닌다(22절). (394.5)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배울 때에 우리는 이타적이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정신에 압도되고 겸비하게 된다. (394.6)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3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