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파르들처럼 일곱 잔도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순서(땅, 바다, 강, 해)를 따른다. 여기 나오는 심판 또한 우주적이다. (199.1)
 그러나 쇼파르가 무엇이든지 3분의 1만 황폐하게 만들었던 것과 달리 잔들은 이제 “땅” “바다” 그리고 “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다. 일곱 쇼파르가 교회의 죄악을 다루었던 것과 달리 일곱 잔은 이제 역사의 마지막 때에 초점을 맞춘다. (199.2)
 하나님의 진노는 두 국면으로 나타난다. (199.3)
 먼저 나오는 다섯 잔이 첫 국면을 구성한다(계 16:1~11). 그 기간은 매우 짧은 것임이 분명하다. 다섯째 잔의 피해자들이 첫째 잔에서 얻은 종기(腫氣)에서 아직 회복하는 중이다. 원래 죄 많은 상황에 나타나는 특징이 심판인바 그것은 “상호성의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4 여섯째와 일곱째 잔은 둘째 국면에 해당된다(계 16:12~21). 아마겟돈의 기간으로서, 그 국면에는 열방의 집결에 대응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을 부르는 심판이 있다. (199.4)
 헌데가 나는 국면
 첫째 잔은 이방 신의 표를 받았던 사람들의 신원을 밝힌다(계 16:2). 죄악이 만들어낸 헌데가 난다. 그리하여 짐승의 표는 구약의 문둥병 저주를 연상하게 하는 종기가 되고(신 28:27을 보라; 참조 레 13장), 내부가 부패된 것의 외적인 표로 작용한다. (200.1)
 죄 안에는 바로 그것이 원인이 되는 형벌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이 상징적인 표현 뒤에 있는 교훈이다. 짐승에 대한 경배와 그 결과로 오는 경배자들의 종속과 고립은 그 자체 안에 죽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 (200.2)
 이 첫 번째 재앙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애굽에 내린 여섯째 재앙을 회상하게 한다는 점인데, 그 재앙은 애굽 사람들과 그 사제들 모두를 괴롭게 만들었다(출 9:11). 그 종기는 짐승 자신은 물로 그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겨난다. 고대의 재앙이 애굽의 신들이 헛것임을 드러냈듯이 그 재앙은 바벨의 신의 가면을 벗긴다. 종기는 아무도 면제해 주지 않으며, 모두가 가려움을 겪는다. 짐승 신은 그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 사제들까지도 그들 자신의 종교에 희생을 당한다. (200.3)
 첫째 잔은 첫째 쇼파르와 마찬가지로 땅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재앙이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제까지는 땅만 황폐하게 만들었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 몸 깊숙한 곳으로 타 들어간다. 첫 번째 쇼파르의 파멸은 이제 첫째 잔에서 그 충만함에 도달한다. (200.4)
 첫째 나팔에서 알려진 종기는 교회와 야만인들 사이의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황폐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었고, 그때 교회는 지상권(至上權)을 얻기 위하여 다투고 있었다. 계시록의 선지자는 인간 역사의 마지막 순간들을 초기 교회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권력 투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국지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이제 첫 번째 잔의 시대에는 전세계적인 범위로 확대된다. 이제 악은 경계할 만한 분량에 도달하였고 지구 전체에 퍼져 있다. 다섯째 잔에서도 종기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것이 그때까지 지속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200.5)
 일곱 잔의 첫 번째 기간 동안 교회는 온 땅을 압제한다. 선지자 다니엘은 이미 이것을 예견했었다. 그의 책 11장 끝에서(단 11:42, 43) 그는 마지막 때에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종교 권력이 이 땅을 지배할 것을 예언하였다.5 (201.1)
 우리가 종교적인 면과 세속적인 면에서 공히 보듯이 교회는 그들의 야망을 잃지 않았다.6 이러한 사건들의 빛에 비추어보면 다니엘와 계시록의 예언들은 더 큰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201.2)
 그 다음의 두 잔은 천사가 땅의 물에 쏟는다. 둘째 잔은 바다를 채우고, 셋째는 강과 물 근원에 미친다. 이어지는 재앙은 애굽에 내린 첫째 재앙과 비슷하다. (201.3)
 물이 피로 변한다(출 7:17~21). 고대 애굽의 상황에서 재앙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애굽사람들이 땅의 신이라고 여겼던 바로(Pharaoh)에게는 나일 강이 땅에 물을 주어서 애굽이 비옥하게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었다. 애굽은 거의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생명체는 오직 나일 강 덕택에 존재하였다. 강을 공격하는 것은 그의 신성과 애굽의 모든 창조 질서에 대한도전이었다. (201.4)
 하나님의 마지막 원수들의 경험은 출애굽기에서 새벽에 애굽인들이 겪었던 경험과 유사하다. 그들은 그때 그들이 숭배하고 의지했던 신,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생각한 신이 사실은 죽음의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다시 계시록의 재앙은 상호성의 법칙을 따른다. “저희가 피를 흘렸으므로” 이제 “저희로 피를 마시게”(계 16:6) 한다. 형벌이 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다시 본다. 전에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게 하였으나 이제는 바로 그 죽음이 반 대로 그들을 공격한다. (201.5)
 그들이 받는 형벌은 그 저지른 범죄에 비례한다. 그들에게 “합당한”(6절) 벌이 내린다. 공의를 부르짖는 희생자들과 함께 있었던 제단의 천사는 물들의 천사가 하는 말을 반향한다.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7절). (202.1)
 둘째와 셋째 쇼파르도 물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선고하였다(계 8:8~11). 그 때 그 저주는 영적인 것이었다. 교회는 물질적인 성공에 너무 사로잡혀서 그 신자들의 본질적인 필요를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202.2)
 물로 상징된 영적인 생활은7 말라버렸다. 쇼파르는 물들의 3분의 1만을 저주하였지만, 진노의 잔은 땅의 모든 물과 섞인다. 쇼파르 때 재앙이 바다에만 한정되었던 것과는 달리(계 16:3; 8:8), 이번에는 땅에 있는 모든 강과 물 근원이 피로 변한다(계 16:4). (202.3)
 바벨 거민들의 영적인 상태는 비극적이다. 밧모에 유배당해 있던 선지자에게 피로 변한 물은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그 섬의 해안에서 선지자는 미래의 죽음으로 오염된 수평선을 바라본다. 바벨의 백성에게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이제 물맛도 보지 못한다. (202.4)
 넷째 잔은 셋째의 저주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물도 부족한데 게다가 타는 듯한 열기가 가세한다. 하늘에는 비도 없고 구름조차 없다. 영적인 가뭄이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