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역사 제4장 그리스도교가 이교화되어 가는 과정 제2절 로마 제국시대의 점성술 성행과 태양신 숭배의 풍조
 

아그립파가 율리아 가문을 위해 건축한 판테온
(277.1)
 이 판테온이 A.D. 80년에 대 화재로 다소 파손되었으나 그 후에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셉티무스 세베리우스(Septimus Severius, A.D. 193-211) 황제 때와 카라칼라(Caracalla, A.D. 211-217) 황제 때 완전히 복원되었다. (277.2)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판테온이 교회당으로 헌당되었기 때문에 분노한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왔다고 주장한다.39) (277.3)
 그러나 이 “판테온”이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고,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라고 개명된 것은 A.D. 609년 3월 16일 포카스(Phokas, A.D. 602-610) 황제의 승인 하에서 교황 보니파티우스 4세(Bonifatius Ⅳ, A.D. 608-615) 때였다. 이렇게 되기 약 210여 년 전인 A.D. 392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 A.D. 379-395)는 이 새 기독교적인 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제정하고 동시에 이교를 철폐하는 법령을 공포했다.40) (278.1)
 이 칙령으로 또 다시 나머지 신전들과 우상들이 파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 판테온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그 원형대로 보전되어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실 점성관 마테르누스의 아주 치밀한 정치적 종교적 정책 때문이었다. 마테르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한 점성학자인 동시에 매우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의 정치적 종교적 수완으로 A.D. 321년 3월 7일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포된 칙령 “일요일 휴업령”이 지상에 존속하는 한 점성술의 기본인 일, 월, 화, 수, 목, 금, 그리고 토요일로 명기된 달력과 함께 이 “일곱 혹성신들”에게 봉헌되었던 그 판테온도 역시 계속 존속할 것이다. 이 “태양의 날” 곧 일요일이 그리스도교 내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한, 그리고 이 판테온이 로마 가톨릭교의 성당으로 남아있는 한 이 둘은 모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고대 태양신 숭배의 유물 중 “보이지 않는 기념비”라면, 다른 것은 “보이는 기념비”이다. (278.2)
 현대의 일요일 신성론 신학자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점성학자 마테르누스의 비상한 역량으로 이룩한 이 공적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3대 점성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베티우스 발렌스, 그리고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 이 세 사람들 중에서 태양의 날-일요일을 그리스도교에 접목시켜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도록(계 18:3) 한 자로서도 당연히 제1인자였기 때문이다. (279.1)
 마테르누스는 오늘날에 와서도 현대 점성술사들에게 점성학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마테세오스 리브리(Matheseos libri, VIII)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모두 8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점성학 저술 아포텔레스마티카(Apotelesmatica)가 “4권의 책”이라는 뜻으로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라고 불리는 데 반하여 마테르누스의 저술은 “8권의 책”이라는 뜻으로 옥토비블로스(Octobiblos)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279.2)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지금 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당신은 이미 신성한 지식을 입수하여 별들의 비밀을 부여받았으며 그 기술의 첫 번째 원리를 읽혔다.... 그대의 훈련과 규범이 유덕한 사제의 그것을 능가하도록 노력하라. 신성한 그릇으로서의 당신의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인증된 후에도, 해와 달, 떠돌이별들이 당신을 통하여 지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41)
(279.3)
 d. 대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와 테트라비블로스
 그리스인들이 자랑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의 생물과 생애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아랍인들이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그는 78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9.4)
 비잔티움의 테오도루스(Theodorus Meliteniota of Byzantium)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의 헬라 도시 프톨레마이스(Ptolemais Hermii)에서 태어났다. 그의 중요 작품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A.D. 127-145년 사이에 저술한 것들인데 늦게 잡아도 151년경에 모두 다 이루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그 천문학적 저술들은 모두 사당에 소중히 안치되었는데, 그의 이 위대한 책 헤 마테마티케 신탁키스(He Mathematike Syntaxis, Mathematical Collection, 수학 집대성), 또는 메갈레 신탁키스 마테마티케(Megale Syntaxis Mathematike)라는 저술 때문에 그는 호 메가스 아스트로노모스(Ho Megas Astronomos, The Great Astronomer, 대천문학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280.1)
 9세기에 와서, 로마의 문명을 이어받은 아랍의 천문학자들이 그리스어의 “위대한”이라는 형용사 “메가스”(magas)의 최상급인 “메기스테” (megiste, 가장 위대한)를 이 책에다가 붙인 다음, 아랍어의 정관사 “알”(Al)을 더하여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존칭으로 받들어왔던 것이 오늘날까지 그 책의 이름으로 더 널리 잘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42) (280.2)
 프톨레마이오스는 그가 저술해 남긴 수학 집대성이라는 천문학 저술 때문에 “대천문학자”라는 존칭을 받게 된 것처럼 또한 그가 저술해 남긴 “4권의 책”이라는 뜻의 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로 더 널리 알려진 점성술의 대작 아포텔레스마티카(Apotelesmatica) 때문에 대점성술사(Ho Megas Astrologias)라는 존칭도 아울러 받았던 것이다. (280.3)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외에도 몇 권의 책들을 더 저술했다:

   ① 광학(Optica)

   ② 아나렘나(Analemma)

   ③ 지리학(Geographike hypheoesis, 8 bks.)

   ④ 화성학(Harmonica, 3 bks.)

   ⑤ 기하학(Planisphaerium) 등이다. (280.4)
 

프톨레마이오스. 초상화
(281.1)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입각한 천구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수학 집대성이라는 그의 저술(Almagest)이 헬라의 천문학자 힙파르코스[Hipparchos](146?-127 B.C.)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시작하고 연구한 우주의 지구 중심설 곧 천동설을 이어받아 계속 관찰하고 연구해서 이룩한 천문적 각종 지식을 프톨레마이오스가 최종적으로 총 정리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4권의 책(Tetrabiblos)이라는 그의 저술은 헬라의 천문학 비조 유독쿠스(408-355 B.C.)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최초로 꾸며서 만든 점성술을 이어받아 연구하고, 체계화하여 힙파르코스를 거쳐 내려오면서 발전시킨 것을 프톨레마이오스가 최종적으로 총 정리하여 펴낸 점성학적인 저작인 것이다. 그래서 천문학과 점성학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합리주의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서로 구별짓지 않았던 한 학문이었다. (282.1)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입각한 천구도
(283.1)
 이 두 저술들은 약 175년경에 라틴어로 번역된 이래, 로마 제정 시대부터 16세기의 폴란드의 사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A.D. 1473-1546)가 죽은 해에 출판한 태양 중심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이 수립되어 학계에 알려지면서, 또 1598년에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 Brahe, A.D. 1546-1601)의 신 천문 체계론(Astro- nomiae Instauratae Mechanica, A.D. 1598)이 발표되고,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Galileo Galilei, A.D. 1564-1642)가 1609년에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깊이 관측한 후 지동설의 확실성을 주장하여, 1633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설치한 종교 재판을 받아 생명의 위협 때문에 취소했을지라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Epur si muove)고 천동설의 거짓됨을 증명했을 때까지, 실로 1500여 년 동안 이 두 저술들은 각각 천문학과 점성술의 성경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권위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나긴 중세기 동안 천문학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의학에서부터 로마 가톨릭 신학에 이르기까지 과학, 예술, 종교, 사회 그리고 정치 등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니, 이는 서양 문명의 “암흑 시대”“로마 가톨릭교회의 황금 시대”를 이끌어 온 견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283.2)
 

갈릴레오가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서 지동설을 거부하는 가톨릭 추기경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
(2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