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캐사르(Julius Caesar, ca. 100-44 B.C.)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사제장’)라는 이교의 최상위의 존칭을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해서 호칭하여 문헌에 남기게 한 것은 정적 폼페이우스(Pompey, 106-48 B.C.)를 추격하여 이집트를 침공한 이후였다. 로마의 공화정이 위태롭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율리우스가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둘러보고, 그들의 문예, 학술, 종교 등의 문화와 제정 정치 형태의 이집트의 문명에 감탄했다. 그가 비록 무력으로 그들 위에 군림했을지라도, 그 때 그는 이미 그들의 절대 군주의 제정 정치 제도와 신비스럽기 한없는 밀의식적 종교 그리고 신기한 점성술과 천문학에 압도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정적 키케로(Marcus Cicero, ca. 106-43 B.C.)로부터 점성술 맹신자로
“허풍쟁이”(charlatanism)
16)라는 비난을 받게 되어버릴 만큼 점성술에 심취되어 그 신봉자가 되었던 것이다. 오덤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2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