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21장 성소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준다
 백악관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한 장소이다. 영국의 여왕이 살고 있는 버킹검 궁전도 특별하다. 아무 때나 대통령 혹은 여왕과 대화하고 싶다고 우리 마음대로 들어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여러 해 전 한 정신병자가 여왕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여왕의 경비병들이 그를 끌어냈다. (159.2)
 사람이 어떤 장소를 특별하게 할 수 있다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어떠하겠는가? 선지자 이사야는 그가 본 놀라운 계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59.3)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 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 6:14).
(159.4)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오직 하나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며 영원하시다. 그분의 영광과 능력, 또한 자비와 공의를 모두를 포함하는 사랑의 품성을 포함하는 그분의 유일 무이한 거룩함은 그분의 속성의 집합체이다. (160.1)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그 이상을 보았다. 분향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빼앗으려다 부정한 문둥병에 걸려 죽은 웃시야 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순결하고 영원하신 분이다. 인간 지도자는 연약하고 실수가 많으며 자주 신뢰할 수 없지만 우리는 완전무결하신 우주의 지도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160.2)
 하나님은 대통령이나 여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거룩해지는 장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대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소 안에서 그 거룩함이 더해갈수록 접근하는데 더 많은 제한이 따랐다. 일 년에 오직 한 번 대제사장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2, 29~30,34). 그리고 제사장들만이 “성소”에(출 30:19~21),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160.3)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룩한 것들이 된다는 원칙을 성소가 입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원칙은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된다. (160.4)
 하나님의 거룩함은 유일무이한 것이지만 그분은 그분의 거룩함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자라남으로 그분께 더욱 가까워지는 만큼 그분의 거룩함 안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161.1)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이타적이며 심지어 자기도 희생하는 친절과 자비가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포함한다. 그분은 공의를 없애시기 위해 자비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증명한다. 우리가 자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죄의 결과를 짊어지셨다. (161.2)
 성경의 사랑은 자기 만족으로 가득한 헐리우드 영화 속의 사랑이 아니다. 죗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그분의 참된 사랑의 의미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는 그분이 필요하다. (161.3)
 내가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예수께서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주제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얼마나 옳은지 깊이 깨닫게 된다(마 22:36~40).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에 아주 크고,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진정한 사랑이 하나도 없기에 성경 전체가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161.4)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짐을 짐으로 하나님의 품성에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 자기 백성의 지파 이름을 자신의 가슴에 지녔던 이스라엘의 거룩한 대제사장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궁극적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사 53:4~5). (161.5)
 성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과 거룩함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한 예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그분의 거룩한 임재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신 34:10).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포기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하는 모세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진실로 순결하고 무아적인 것이었다(출 32:32). (162.1)
 다윗도 사랑과 거룩함 사이의 연관성을 알았다. 그는 노래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1~2). (162.2)
 왜 다윗은 연합을 대제사장의 기름과 비교했을까? 다윗이 언급한 기름은 아론을 거룩하게 한 관유였다.(레 8:12). 다윗의 요점은 연합은 그 기름과 같이 거룩하다는 것이었다. 아론이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62.3)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개념은 제칠일 안식일에서 볼 수 있다. 출애굽기 31장 12~1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성소건축에 대한 지시를 하신 후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여”(13절)라고 하시면서 안식일은 그분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기념하시기 위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에(17절) 그분의 거룩한 성소를 짓는 일일지라도 안식일에는 쉬어야 함을 그분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셨다. (162.4)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특별히 연결되었던 실제적인 공간이었던 것처럼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특별한 방법으로 보여주신 시간이다(신 5:15)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163.1)
 안식일은 유대 전승에도 기록된 것처럼 시간의 성전이다. 성소로 올 수 없을 때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어디 있든지 시간의 성전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163.2)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그들이 율법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그들을 구속하셨기에 그분의 성화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의 백성을 성화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인류는 그들 스스로를 성화되게 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것 이상으로 자신들을 성화되게 할 수 없다. 이 거룩함은 사랑안에서 성장이고 성화는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이기 때문에 성화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랑의 기념일이다. (163.3)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이후에 그분을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 놀라운 기도에서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분과 그리고 서로를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회복시키신다는 생각들을 하나로 묶으셨다(요 17:17~24). 예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라고 탄원하셨다. (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