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22장 매일의 제사는 구원의 보증
 이제 둘째 사망과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뿐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행 4:12). 매일 매일 영접하고 적용하는 그분의 보혈만이 우리의 유일한 확신이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너무나도 풍성한 확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풍성한 생명(요 10:10)과 더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롬 5:17). (178.1)
 우리의 확신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이상 우리의 확신은 보증된 것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178.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둘째 사망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버리신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호프 다이아몬드를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는 빌 게이츠가 수십 억 달러의 자산가라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빌게이츠는 그 사람이 가진 재산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값을 매길 수가 없는 존재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실 것이다!(롬 8:31~39) (178.3)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과 끊으려고 애쓰고 있다. 사단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으며 “아니오”라는 대답에도 개의치 않는다. “죄가 문에 엎드리나니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창 4:7). 죄의 소원이라는 것은 부드러운 털의 야옹이가 여러분의 무릎 위에 앉아 그렁거리고 싶어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178.4)
 전혀 다른 것이다! 죄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검치호(북아메리카에 살았다고 생각되는 20cm 이상의 칼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역자 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노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이다. (179.1)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은 우리의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고 계신다. 오직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을 들어오시게 할 때만 들어오실 것이다(계 3:20). 죄와 사단과는 다르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신다! (179.2)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과 세계를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다(요 1:3, 히 1:2).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생애를 그분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우리가 원한다면 그것을 허락하심으로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들에게 그분을 사랑할 것을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강요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로보트가 아닌 친구를 원하고 계신다. (179.3)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운 우리의 선택을 통하여 그분께 이끌리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 들리기로 선택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대적하고 배반했지만 그분은 또 다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신다. (179.4)
 내 컴퓨터도 나에게 기회를 준다. 나는 바탕화면에 있는 문서들의 아이콘을 드래그해서 “휴지통”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서가 삭제되기 전에 대화상자가 화면에 나온다. 그것은 이 파일을 영구히 삭제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삭제”“취소” 둘 중의 하나를 클릭할 수 있다. (179.5)
 우리가 살아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생명이 대화상자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버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다. (180.1)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책임을 담당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80.2)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즉시 우리를 죽이심으로 그분에게로부터 “끊어” 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내심 있게 우리에게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참고 벧후 3:9). 구원의 확신은 무조적인 것이 아니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180.3)
 만일 우리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호소를 지속적으로 거절한다면, 우리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마 12:31~32).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히 6:4~6).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해 호소하시는 그것 밖에 없다. (180.4)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을 포도원에 비유하시며 탄식하셨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4). 이것들은 불길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사 5:5~6). (180.5)
 돌이킬 수 없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다. (180.6)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는 아무도 “끊어”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반응에 대한 희망이 있는 한 계속해서 호소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무식해지고 기만당한 것을 아시기에 “아니오”라는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다면 그분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인정하실 것이다. (181.1)
 경고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포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너무 악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므낫세를 기억하길 바란다. 그는 유대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는 너무 악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담 후세인이 좋은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는 무고한 피를 흘리게 했으며, 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렸고, 우상숭배를 아주 열광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에 우상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경멸했다(왕하 21:1~17; 대하 33:1~10). 결국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셨기에 그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다(대하 33:11). (181.2)
 이것이 이야기의 끝일까? 이야기는 계속된다. 겁에 질린 므낫세는 자신의 우매함을 깨달았다. 다음에 일어난 것은 전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회심의 경험 중의 하나가 된다. (181.3)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 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2~13). (181.4)
 정말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에 대한 놀라운 보증이다! 벼랑 끝에서 다시 얻은 구원이다!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