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2부 하늘은 붉다 제6장—외치는 천사들
 우주의 무한함과 아름다움에 외경심을 느낀 인간 피조물은 그것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 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의 시와 기도들은 경배를 창조와 직접 관련시킨다(시 95:6; 102:18; 느 9:6).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창조로써 보여 주셨다. 그분의 무한한 선하심은 우리를 그분께 대한 경배로 초청하고, 그분의 근접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경배는 창조에 대한 유일한 화답이다. 참으로 예배는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거리감과 그분의 피조물의 호흡 하나까지 지도하시는 그분의 근접성을 이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171.4)
 성경의 가장 첫 페이지들, 즉 창조에 대한 두 이야기는 이 이중의 현현을 암시한다. 첫 번째 이야기(창 1:1~2:4)에서 엘로힘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신성(神聖)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시다. 둘째 이야기(창 2:4~24)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내재해 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 역사와 실존의 신성,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172.1)
 성경은 창조의 이야기로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창조의 연대기적인 과정을 말해 주는 것뿐 아니라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규정해 준다. 성경은 경배의 근거를 제공해 주기 위하여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172.2)
 그러나 계시록의 본문은 창조 이상의 것을 암시한다. 창조를 언급하는 전통적인 세 부분(하늘과 땅과 바다)에 더하여 기대하지 못한 물들의 근원을 언급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광야에 살던 이스라엘에게 물은 곧 생명이었다. 따라서 본 구절의 물들의 근원”은 죽음과 죄악의 광야와 대조된다(계 12:6, 14; 17:3). (173.1)
 어린양은 그분의 백성을 생명수 샘물로 인도한다(계 7:17; 22:17). 마찬가지로 에스겔서에서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것처럼(창 2:10~14) 물 샘들이 풍부한 희망의 예루살렘을 그려본다(겔 47:1~12)3 물들의 근원에는 그러므로 미래적인 울림이 있다. 그것은 에덴동산처럼 그려진 이상적인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미래의 창조에 대한 희망을 제공한다. (173.2)
 둘째 천사
 느닷없이 어조가 달라진다. 둘째 천사는 압제자의 진영을 바라보며 그 기별을 반전시킨다. 희망의 복음 대신 우리는 이제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는 심판에 대하여 듣는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 다 하더라”(계 14:8). (173.3)
 그 동사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어서 그 멸망이 확실함을 보여 준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예언하는 사건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과거 시제로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사 21:9)라고 선포한다. 마찬가지로 선지자 예레미야도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렘 51:7, 8)라고 선언한다. (173.4)
 바벨의 제자들은 그의 포도주에 취하여 현실 감각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속임을 당하였다. 바벨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가장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 성은 몰락하였다. 잠언에 의하면 그것은 술 취한 자들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잠 23:31~34)라고 말한다.

  (173.5)
 정절이 있는 144,000명과 대조하여, 계시록은 바벨의 제자들을 간음한 자들로 묘사한다. 어린양 진영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과 신실함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다. 그러나 바벨 진영은 하나님을 세상의 제도로 대체하였고, 종교는 간음이 되었다. 둘째 천사의 사명은 이러한 사기(詐敗)를 인류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록과 다니엘는 바벨의 권력을 인간적인 것이라고 묘사해 왔다. 사람의 얼굴을 한 작은 뿔은 찬탈자로 행동하였고(단 7:24, 25; 8:9~11, 25), 짐승은 하나님을 가장하면서(계 13:4) 양자(者) 모두 인간의 제도를 대표하였다. (174.1)
 천사의 의도는 정죄하기보다는 경고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모든 종류의 몰락의 본보기이다. 기원전 539년 고레스의 침략군에 의한 역사적 바벨론의 멸망은 성경에서 모든 자만과 자부심(自負心)의 종국적인 결과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자만과 오류가 없는 체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몰락하고 만다. 어떤 정치 이상(理想)도, 종교적 이상도, 남자도, 여자도 이러한 가능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벨론은 또한 느부갓네살의 성벽이나 중세 교회의 대 성당들을 넘어서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정신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교만이 불러올 수 있는 몰락을 경고한다. (174.2)
 셋째 천사
 셋째 천사는 바벨론의 멸망이 양쪽 진영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를 끌어낸다. 바벨의 진영으로 말하자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누구든지 짐승과 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경배하다”라는 동사는 의미가 중대하다. 첫째 천사는 바로 전에 그 단어를 창조의 문맥에서 사용하였다(계 14:7). 이제 짐승은 그것을 빼돌려 자신이 창조주의 자리에서 “경배를 받으”려고 한다. (175.1)
 계시록은 짐승의 추종자들을 144,000처럼 묘사한다. 그들도 인을 받았고(계 14:9, 11; 참조 7:3), 그들의 인은 그 이마에 표시된 것으로 나타나는바 그들이 내적으로 짐승에게 충성하고 있 다는 외적인 표이며, 손에 표를 받은데서 보이듯이 그들의 행동으로도 충성한다는 의미이다. (175.2)
 공교롭게도 짐승의 추종자들은 그들 스스로 가진 착각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포도주,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계 14:10). 바벨론의 포도주는 그분의 포도주와 섞일 것이다. 그들의 흠에는 그들이 받을 형벌이 포함되어 있다. 더 마실수록 더 통제력을 잃게 되고, 더 통제력을 잃을수록 그들은 더 많이 마신다. (175.3)
 비극이다. 바벨론의 연인들은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바벨의 건축자들과(창 11:3, 4), 다리오의 방백들과(단 6:6),4 이제는 짐승의 추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과 동일한 성공에 대한 강박감이다. 자기 의존의 정신에서 태어난 그 치명적 결점은 어떠한 외부의 창조주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175.4)
 그러나 그들의 모든 업적, 그들의 모든 수고는 연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도]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계 14:10, 11). 그 묘사는 공교롭게도 저 유명한 힌놈의 골짜기(게이 힌놈[Gey Hinmom])를 연상시킨다. 거기서 “게헨나”(Gehenna)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그곳은 예루살렘 남쪽의 희생 제사를 드리던 장소로서, 거기서 이스라엘이 자기의 아이들과 유아들을 몰렉에게 불살라 바쳤다.5 요시야 왕이 결국 그곳을 더럽게 하고 폐하였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왕하 23:10). 예루살렘의 백성은 나중에 그 지역을 그 도시의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바꾸었다. 끝없이 불타는 쓰레기와 몰록에게 가증한 제사를 바치던 과거사가 연루된 이 쓰레기 하치장이 바벨의 교만한 추종자들의 최후의 목적지가 된다.

  (175.5)
 여기서 계시록이 영원한 지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 이미지는 바벨 제의의 우상 숭배적인 본질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세토록”이라는 표현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기보다는 분명한 최후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불살라진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사고(思考)가 이사야서에도 입증되어 있는 것을 본다(사 33:14). 거기서 “삼키는 불”“영영히 타는 것”과 대응되면서, 이 불이 그 물건에 대하여 영원한 결과를 남긴다. 는, 즉 그것을 영원히 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선지자는 바벨론과 그 추종자들의 멸망을 세 상의 쓰레기의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묘사한다. 절대적이고 분명한 죽음이다. (176.1)
 그러나 어린양의 진영에서 보면 바벨론의 멸망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천사가 그 뉴스 를 전할 때 바벨은 그 성공의 정점에 있다. 인간 제도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176.2)
 이러한 배경에서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인내를 북돋는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 나니”(계 14:12).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첫 단어에 대하여 오해해 왔다. 성경에서 “성도”(카도쉬[qadosh])라는 말은 항상 훌륭한 성적표만 받는 우리 어린 시절의 모범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선지자가 그리는 성도는 악몽에 등장하는 장면과 더 비슷하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정해진 질서를 방해하며 항상 사회·문화적인 흐름에 역행한다. 마지막 때의 성도는 혁명가들이다. 그들은 마지막이 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이미 다른 세상에 자신을 맞추고 있다. (1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