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2부 하늘은 붉다 제6장—외치는 천사들
 유대 전승도 킵푸르의 심판을 창조와 일치시킨다. 창세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가장 오래된 주석 가운데 하나에서는 킵푸르의 탄생이 우주의 탄생과 동시에 일어난다.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었다. 한 날이다. 이것은 찬양받으실 거룩하신 분이 그들(이스라엘)에게 한 날을 주셨음을 의미하는데, 그 날은 다름 아닌 킵푸르의 날이다.”14 (182.2)
 이 날 드려지는 기도와 그것들에 영감을 불어넣은 신학적 사색들은 모두가 동일한 심판과 창조의 결합을 지적한다. “찬송을 받으소서, 오 주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 주님의 은혜의 문들을 여는 분 그리고 빛과 어두움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의 용서를 기다리는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여!”15 (182.3)
 “인간이 그분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다면 어떻게 인간이 그의 창조주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16 (182.4)
 “우리는 모든 거룩함을 이 날에 부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두렵고 떨리는 날이기때문입니다. 이 날에 주님의 통치가 확립되며, 주님의 보좌는 굳건하여지소서. ∙∙∙이는 주님이 심판자이시며, 기소자이시며, 증인이시고, 기록하고 인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랫동안 잊혔던 것들을 기억하시고 기억의 책을 펴실 것입니다. ∙∙∙ 그때 큰 쇼파르의 소리가 울릴 것이며, 침묵의 소리가 들리고, 천사들은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혀, ‘보라, 심판의 날이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17 (182.5)
 “오, 주 우리 하나님! 모든 인간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앞에 엎드려 경배하도록 당신의 모든 피조물 위에 당신의 이름의 두려움을 펼치소서! ∙∙∙ 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는 주권과 능력이 당신의 손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두려운 이름이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게 하소서.”18 (183.1)
 성경과 유대교의 의례문(儀禮文)에 공히 나타난 것처럼, 이러한 개념은 요한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가 하는 말의 배경이 된다. (183.2)
 이 예언은 19세기부터 계속해서 정확하게 심판과 창조로 그 자신을 규정하는 큰 운동에 역사적으로 적용된다. 그 종교 운동은 하늘의 킵푸르에 대하여 증언할 뿐 아니라, 땅의 거민들에게 인자의 임박한 재림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들을 새 세상을 위하여 준비시킨다. (183.3)
 인자
 선지자는 일곱 징조의 시리즈를 해와 달로 옷 입고 별들로 관을 쓴 여인을 보여 주는 이상으로 시작하였다. 이제 요한은 구름으로 치장하고 금 면류관을 쓴 인자의 이상으로써 그것을 마무리한다. 인자의 이상은 여자의 이상에 화답한다. (183.4)
 그리스도의 강림은 광야로 피신해 간 여자의 탄식에 대한 화답이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말 미암아 그리고 이 사건을 위하여 산다. 그것은 성경의 희망의 절정이며, 그 희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에 영감을 불어넣기까지 하였다. 바로 마라나 싸(marana tha), “오,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인사말이다(참조 고전 16:22). 아람어 낱말 다니엘 7장에서 인자의 도래를 묘사하는 바로 그 동사이다(단 7:13). (183.5)
 끝이 이르렀다. “끝”에 대한 그의 기별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지자 아모스는 익은 과일로 가득찬 광주리를 보여 주는 이상을 받았다(암 8:2). 그 이상은 끝을 익은 과일, 즉 성장 과정의 절정에 비교한다. 그 이상의 묘사에 사용된 단어들은 끝과 과일 사이의 상호 관계를 암시한다. 히브리어로 “끝”(케츠[qets])이라는 단어는 “익은 과일”(카이츠 [qayits])이라는 단어의 메아리로 들린다.19 (183.6)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끝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희망이다. 끝의 이중적인 성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선지자는 수확의 은유를 사용하였다(욜 3:13). 수확은 익은 곡식 단을 모으는 것과 함께 줄기를 베어 내는 수확자의 폭력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을 함께 암시한다. (184.1)
 계시록의 선지자도 끝을 묘사하기 위하여 동일한 수확의 이미지를 활용한다(계 14:14~19). 그러나 그 끝의 양면적인 특성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선지자는 팔레스타인의 두 가지 중요한 수확을 예로 들어 묘사한다. 그것은 봄에 하는 곡식의 수확과 가을에 하는 포도 수확이다.

  (184.2)
 곡식의 수확은 신실한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것을 묘사한다(14~16절). 그 이미지에는 희생 제사의 분위기가 들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처음 익은 열매들”이다(4절). 요한은 그 수확을 인자의 강림과 직접 연결시킨다. (185.1)
 계시록의 이상은 여기서 다니엘 선지자의 이상과 일치된다. 그도 또한 인자의 도래의 관점에서 심판을 인간 역사의 최후로 선언한다. 다니엘 7장은 인자를 심판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시킨다. 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와서, 보좌를 수여받기 전에 그분의 임재 앞으로 인도된다(단 7:13, 14: 참조 7:26, 27). (185.2)
 본 구절은 동일한 전개를 따른다. 인자는 먼저 그분의 백성을 자신에게로 분리하고 모으는 수확자로 오신다. 그것은 고소당한 자의 편에서 행하는 긍정적인 심판이다(단 7:22)20 수확은 생명의 기별을 전한다. 여기서 성경의 단어 선택은 매우 의미가 깊다. 본 구절에서 “수확”(쎄리스모스[therismos])과 “거두는 행위”(세리조[therizō])를 표현하는 그리스어 낱말들은 곡식 단을 베는 것보다는 단을 모으는 행동을 시사한다. 단은 알곡을 달고 있다. 그 이미지는 저장의 개념, 그래서 안전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수확자는 알곡을 그것들의 최종 목적지에 안전하게 모아들여 놓았다. (185.3)
 다른 한편으로, 포도의 수확은 악인들에 대한 형벌을 묘사한다. 이번에는 이상에서 수확자를 불과 관련시킨다(계 14:18). 그것은 다니엘 7장에서처럼 부정적인 심판의 도구이다(단 7:11). 더욱이 우리는 순교자의 제단으로부터 나와서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를 본다(계 6:9; 참조 8:3~5). 이 심판은 복수하는 공의의 행동, 즉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 짜인 포도즙은 핏방울처럼 떨어진다.21 실제로 선지자는 포도즙 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계 14:20). 그 비유는 전장(戰場)의 말들이 그 말굴레까지 피바다에 빠져 있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185.4)
 그 지리적 범위를 보면 학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600스다디온, 어림잡아 300킬로미터는 된다. 그 숫자는 물론 상징적이다. 그 범위의 보편성, 즉 “온 땅”22을 암시하는 숫자 4(4 × 4 × 100)를 쓰고 있다. 하나님의 형벌은 온 우주에 미친다. 게다가 이 숫자는 144,000(12×12)처럼 제곱되어 있어서(4× 4) 그 숫자로 상징된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치되는 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땅의 진영(숫자 4) 대(對) 하나님의 언약의 진영(숫자 12 = 4 × 3)이 맞서고 있다. 그 수확은 “성 밖에서”(20절) 벌어진다. 그 말 또한 상징적인 것으로, 그곳은 전통적으로 이방(히브리어 고임[goyim]), 즉 원수의 진영에 속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장소이다.23 이것은 계시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구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역겨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것 때문에 계시록을 정경(正經)에서 제외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진노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포도주를 피로 만드는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어 보였다. (185.5)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자연스러운 표현법이다. 그 사건의 특별한 본질에 대한 강렬한 감정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고찰을 넘어서 그 공상적인 이상은 마르틴 루터가 이해하지 못했던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즉 공의가 없이는 사랑도 작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의의 엄정함과 요구 사항들을 무시하는 감상적인 사랑의 이론가들은 대개 압제당하는 굴욕이나 불의의 쓴맛을 맛본 적이 없는 팔자 좋은 이타주의자들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공의(체데크[tsedek])를 은혜(헤세드[hesed])와 함께 말한다.24 (186.1)
 하나님의 사랑은 비참한 현실 위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그저 좋은 느낌, 감미롭게 속삭이는 말 그리고 친절한 미소,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으로서, 그러한 상황에 있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한다. 그것은 원수와의 타협을 불허한다. 악의 철저한 멸절이 없는 한 죽음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본 구절에 그려진 끔찍한 장면 뒤에 있는 기별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철저하고, 포괄적이며, 피의 바다처럼 온 땅을 덮는다. (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