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2부 하늘은 붉다 제6장—외치는 천사들
 제6장 외치는 천사들 (요한계시록 14:6~20)
 땅을 향하여 급히 날아오는 세 천사가 하늘을 가른다. 우 리는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온다. 땅에는 다시 사람들이 있다. 하늘의 사자(使者)들이 세상의 운명에 관한 뉴스를 가지고 있다.

  (167.1)
 그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강림하기(계 14:14) 직전에 있으며,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을 뒤따르고 있다(계 13:2 이하). 두 구절이 서로 평행이 되는 것을 볼 때, 세 천사의 기별은 다니엘 7장으로 보면 심판의 때(단 7:9~12), 즉 킵푸르(단 8:14)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제 “정한 때 끝”(단 8:17)에 와 있다. (167.2)
▶ 다니엘 7장 ▶ 요한계시록 13~14장
     1. 네 짐승      1. 열 뿔 짐승
     (사자, 곰, 표범, 열 뿔 짐승)      (사자, 표범, 곰의 모양)
     2. 찬탈하고 압제하는 세력      2. 찬탈하고 압제하는 세력
     (1,260일)      (마흔 두 달)
     3. 하늘의 심판      3. 세 천사의 선포
     4. 인자의 도래      4. 인자의 도래
(168.1)
 계시록에 의하면 땅에는 그때 세 천사의 선포가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168.2)
 첫째 천사
 요한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계 14:6)을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복음”이라고 번역하는 그리스어 에우앙겔리온(euangelion)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승전의 소식을 뜻하는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1 그 단어는 또 원수의 죽음이나 나라들을 분쟁으로부터 구원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하여 이루어진 평화)를 가져다 준 로마 황제의 귀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2

  (168.3)
 이 첫째 천사의 기별은 희망의 소식이다. 인간의 비극의 최후가 다가왔다. 천사의 기별은 두 가지이다.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것과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절). (168.4)
 심판자를 두려워하라
 고대 근동에서 왕은 심판자이기도 했다. 성경에서도 두 기능은 결합되어 있다(출 18:13; 왕하 15:5; 대하 1:10; 시 72:2).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異像)이라는 문맥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는 요구를 해석해야 한다.

  (169.1)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주 오해를 받는 개념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敬畏)는 그분의 눈이 우리를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나타내는 히브리 낱말()은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ŕh)와 필시 같은 어근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169.2)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분의 율법을 관련시킨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신 6:2).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도덕적인 삶의 시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전 12:13). 이 마지막 구절에서 히브리 어구(語句)의 구문법은 등위접속사인 “그리고”를 추가의 의미가 아니라 설명의 의미로 이해해야 함을 암시한다. (169.3)
 전도서의 저자는 “사람”(콜 하아담 [kol haadam])은 심판의 관점에서 볼 때 계명에 구속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4절)고 말한다. (169.4)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선하고, 정의롭고, 옳은 것에 관계됨을 의미한다. 공개적으로만 아니라, 집에서 혼자 있을 때도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신앙은 주일(主日)이나 기도나 교회의 거룩한 장소나 회당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매 행동, 생각 하나하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 그 때문에 성경의 지혜 문학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서 반복되는 것이다. 인간 실존에 대한 심오하고도 도전적인 성찰의 한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9:10; 참조 1:7 이하). (170.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기계적이며 마법적인 종교로 이끄는 미신적인 신앙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사랑과 관련시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라는 권고에 이어서 우리는 사랑하라는 명령을 발견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약속이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시 33:18)신다.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눈에 보여 주는 증표(證票)이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산다. 참 종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다. (170.2)
 요한계시록 14장 7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요청에 이어서 그분을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영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보드(kabod)에는 무거움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무게 있게 여긴다. 그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기별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위선적이고 피상적인 종교의 심장을 강타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기원(祈願)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과 교회당을 짓고, 그분에 관한 신학 논쟁을 벌 일 수는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고, 그 자신의 거짓과 범죄로 절뚝거린다. 지난 세기의 한가운데 일어난 홀로코스트의 사건은 종교의 실패, 특별히 기독교의 실패를 선언한다. (170.3)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저 마음씨 좋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우리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늙은 아버지가 되었고, 현실이기에는 너무나 귀여운 아기 예수님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씁쓸한 비웃음을 띠며 돌아섰다. 어떤 이들은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신은 죽었다”며 선언하였다. 어떤 때는 그러한 믿음이 종교계에까지 퍼졌다. 종교는 영적인 체험, 도덕적인 규약, 또는 단순히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믿는단 말인가? (171.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바라는 것은 고사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 결과로 오늘날 계시록은 너무나도 필요한 책이 되었다. 첫째 천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깨우치기 위하여, 세상의 성을 쌓기에 너무나 바쁜 남녀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 중에 그들에게 강림하실 필요가 있음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속에 불을 켜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촉구한다. (171.2)
 창조주를 경배하라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첫째 천사는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데로 옮겨간다. (1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