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보석들 (출 28:15~21)


새예루살렘의 기초석의 보석들 (계 21:19, 20)

새예루살렘 성을 단장한 보석들 중에 많은 것들은 대제사장의 흉패에도 붙어 있던 것들이다. 새예루살렘성의 보석들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지 이 보석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울 것이다.
(525.1)
 필자의 책 선반에는, 수년 전 모헤이브 사막(Mohave Desert)에서 벽옥 덩어리를 발견한 한 친구가 필자를 위해 깍아서 세공해 준 한 쌍의 책버팀이 놓여 있다. 벽옥은 여러 가지 갈색이 혼합되어 있다. 매력적인 돌이다. 그리고 완전히 불투명체이다. (526.1)
 그러나 요한은 말하기를 새예루살렘은 투명한 벽옥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했으며, 심지어는 정금까지도 투명하다고 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모든 금이 벽옥처럼 불투명체이다. 분명한 사실은 여기서 요한은 대단히 평범한 사물들을 평범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석양의 하늘을 금빛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석양의 하늘이 단단한 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526.2)
 인간의 전체 역사를 통해 볼 때, 군사적인 불안정성 때문에 성벽의 존재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새예루살렘 도성에 성벽이 필요하단 말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성벽을 좋아한다. 우리 모두가 담벽이 있는 집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특히 이끼가 낀 돌로 담벽을 만든 정원을, 또는 담쟁이가 덮여 있는 벽돌 담벽이나, 아니면 낡은 나무 담장과 꼬불꼬불한 담벽들을 좋아한다. 담벽을 보면 우리가 단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전체의, 이면에 있는 어떤 신비한 것을 느끼게 한다. 비록 유리 벽이라 할지라도 벽은 우리를 감싸 주고 있는 다정한 팔과 같은 소속감을 준다. 자기가 원할 때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문만 있다면 필자는 담벽을 마다하지 않겠다. 필자는 성담이 둘러 있는 시골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열려 있는 성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또 성벽이 둘린 공원을 산책하는 것과 그 열린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526.3)
 새예루살렘의 담벽은 강하고 다정한 팔 같은 우정의 담벽이다. 그리고 그 성벽에는 열린 문들이 있다. 그 문들은 종일 열려 있다. 밤이 없기 때문이다.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5). 그 대문들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들이다. “성령과 신부(즉 도성)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1:17). 어느 누구도 인종적인 차별을 당하지 않는다. 비록 대문들에는 열 두 지파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으나 “만국”(흔히 이방인들로 번역된다)이 자유롭게 이 문들을 출입한다(계 21:22). (526.4)
 눈에 보이는 성전이 없는 도성
 아직도 산 정상에 서 있던 요한은 천사가 가르치는 지점에서 새로운 현상들을 보게 되었다. 요한은 만족한 투로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계 21:22)다고 한다. (526.5)
 다니엘 시대의 바벨론 포로 기간과 그 직후의 짧은 기간을 빼고 천여 년 이상 구약의 성전은 옛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본 새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라 했다(계 21:22). (526.6)
 옛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거하심을 상징했던 성막과 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휘장을 치고 있었다. 이 휘장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의 사랑이 성전을 하나의 실재로 만들었다. 그들의 죄가 휘장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526.7)
 그러나 요한은 지금 묵시 중에 산에 서서,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새 날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가증한 일 또 거짓말하는 자”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계 22:3, 21:27). 하나님의 보좌에 떼지어 모여 있는 행복한 백성들은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계 22:4). (526.8)
 그들의 성품은 이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닮게 되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는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사 4:3)라. 이제 더 이상 휘장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놓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러한 휘장을 쳐두는 성전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은 “그의 얼굴을 볼”(계 22:4) 것이다. (527.1)
 하늘 성소 또는 하늘 성전은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였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 성소에 대한 논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실 때 당신 자신을 촛대 사이에 서 계신 분으로 묘사하셨다. 그분은 또 하늘 성소의 보좌 앞에 계신 어린 양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성소의 향단으로부터 일곱 나팔의 경고의 심판이 떨어졌다. 마지막 때에 성전의 내부가 공개되었을 때 “언약의 궤”가 드러나 마지막 때의 144,000의 무리들이 계명을 준수하고 있음을 포고하였다. 그 동일한 내부(지성소)로부터 마지막 일곱 재앙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때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되었으며 아무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527.2)
 그러나 요한과 천사가 요한계시록 21장의 도시를 지켜 보고 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성소는 그리스도의 중보와 심판과 대속죄일 장소로서의 그 기능을 다 마쳤다. “대군 미가엘”이 일어나고(단 12:1)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백성들이 구원을 받아 부활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평상적인 하늘의 성소나 성전이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요한은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527.3)
 풍부한 도성
 이 도성에는 전력 발전소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전력을 만들기 위해 화석·분열·융해 발전기에 대한 토론을 할 때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곳은 태양조차도 더 이상 에너지 공급원이 될 필요가 없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계 22:5, 21:23)기 때문이다. (527.4)
 어느 누구에게도 식량이나 물이 바닥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생명 그 자체가 다함이 없을 것이다. 천사가 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리고 요한이 보니,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었다(계 22:1~3). 벵갈보리수 나무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나무에 줄기가 여럿 달린 모양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나무의 과실은 분명히 노화를 방지하는 효소와 비타민들을 함유하고 있다. 심지어는 나뭇잎들도 “치유”의 능력을 함유하고 있어서 각종 질병을 예방한다. 새 땅에는 고통과 사망도 없다. (527.5)
 하나님이 그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는 도성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는 30년 남짓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가진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다(마 1:23). 이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그리고 분명히 성령 하나님 까지도(계 22:17), 거룩한 도성을 단지 우리들의 집만이 아니라 영원히 그들을 위한 거처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3, 4). (527.6)
 우리가 그토록 하나님을 슬프게 했는데 우리를 위해 이토록 모든 일을 처리해 주시니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고마우신 분이신가! 이에 대한 유일의 설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우리와 가까이 살고 싶어 하신다는 것 뿐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다! (527.7)
 그리고 우린들 또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곁에서의 생활을 즐기겠는가! (5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