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요한계시록 연구 요한계시록 21:9-22:21 — 어린양의 신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살게 될 날을 고대하고 계시다고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방문하사 그대의 자녀들과 함께 잔디에 앉아 계신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서론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을 향해 점차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인 새예루살렘 단원을 다루려 한다. 여기까지 잘 참고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우선 축하를 드린다. 우리는 그 동안 요긴하게 사용해 왔던 요한계시록의 전반적인 교차 대구 도표 중 마지막 부분을 다루게 되었다. (516.1)
 서론과 결론(서문과 발문)
 요한계시록의 서론 또는 서문(1:1~8)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다고 말했다. 결론 또는 발문 바로 전에서(22:10~21)는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계 22:6). (516.2)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책을 소리내어 “크게” “읽는 자”와 그 읽는 것을 “듣는 자”들에 대한 축복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축복으로 끝맺고 있다(1:3, 22:7). (516.3)
 서두에서 요한은 그가 보게 될 것을 쓰고 그것을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는 분부를 받았다.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이 책의 기별이 “교회들을 위한”것임을 상기시키고 계신다(계 1:11, 22:16). 이 기별은 우리와 우리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516.4)
 이 책의 첫 단원에서 토의한 일곱 교회는 일곱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예수님은 이 교회들이 시험과 박해에 직면하여 싸우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용기를 불어 넣으셨다. 새예루살렘의 단원에서는 원수들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스럽게 거룩한 도성에 정착해 있는 교회를 발견한다. 약속된 보상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516.5)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여러분은, 새예루살렘의 단원이 요한계시록 21장 9절과 더불어 시작하여 22장 9절로 끝맺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16~419페이지에서 이야기한 관점에 입각하여 이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416~419페 이지에서 우리는 바벨론 멸망의 단원(17:1~19:10)이 새예루살렘 단원(21:9~22:9)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았으며 두 단원의 시작과 끝이 유사하다는 사실도 보았다. (516.6)
 두 단원이 모두 재앙의 천사에 의하여 인도되어 무엇을 보는 장면과 더불어 시작한다. 두 단원에서 모두, 요한이 천사의 발밑에 무릎을 꿇자 하나님만 경배해야 함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516.7)
 새예루살렘은 실제적인 것인가, 상징적인 것인가?
 사색적인 독자들은, 혹시 새예루살렘이 실제의 도시가 아닌 어떤 상징적인 도시가 아니냐고 반문을 해 온다. (516.8)
 
일곱 교회
(1:10~3:22)
일곱 인
(4:1~8:1)
일곱 나팔
(8:2~11:18)
대쟁투
(11:19~14:20)
마지막 일곱 재앙
(15:1~16:21)
바벨론의 멸망
(17:1~19:10)
천년기
(19:11~21:8)
새예루살렘
(21:9~22:9)
🡸 역사적 절반
진행중인 대쟁투
🡺 🡸 종말론적 절반
대쟁투가 끝남
🡺

새예루살렘
(21:9~22:9)
그리스도께서 평화 중에 한 도성에 모인 교회들에게 보상하심
그리스도는 영원한 등불 21:23
생명나무 22:2
결코 닫히지 않는 문 21:25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22:1, 3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옴 21:10
내가 속히 오리라 22:7

하나님께서는 일곱 교회로부터 새예루살렘에 이르는 모든 사건의 진행을 알고 계시는 것이다.
(517.1)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새예루살렘이 정육방체로 되어 있고 투명하며, 특별히 큰 성 바벨론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 등이다. 그들은 지적하기를, 바벨론의 박해를 자행하고 하나님을 제 방식대로 섬기려 했던 모든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517.2)
 이에 반해 새예루살렘은 박해를 견디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작정한 진실한 사람들의 친교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517.3)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 20절을 그 성서적 근거로 제시한다. 이 성경절에서는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로 이야기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도들의 이름이 거룩한 성의 기초에 기록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결론짓기를, 새 예루살렘은 성결되고, 영화롭게 된, 그리고 불멸의 존재가 된 하나님의 교회라 하였다. 즉 새예루살렘은 실지의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517.4)
 의심할 나위 없이 새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재림 전 심판의 정점에 그리스도가 “혼인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상징하고 있다. (517.5)
 그러나 한 사물이 상징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또 사실일 수가 있다. “백악관”“워싱턴”은 신문지상에서 자주 미국을 대표한다. 분명히 그들은 상징들이지만 동시에 실제로 하얀 백악관이 있는 것이며 워싱턴도 실제의 도시인 것이다. (517.6)
 성경 시대에 “바벨론”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실제의 도시였다. 사실 바벨론이 다니엘 시대의 실제의 도시가 아니었던들 요한계시록에서는 상징적인 가치를 지닐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타락한 어미교회가 “바벨론”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타락한 어미 교회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실제의 도시와 그 압제적인 성격에서 닮은점이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의 신부 또는 교회가 “새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까닭도 교회가 동일한 이름의 한 옛 도시의 영광과 순결을 닮았기 때문이다. (517.7)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문명의 도시 우르(ur)에 있는 집을 떠나 남은 여생을 천막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으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하나님은 언젠가 영원한 도시에서 가정을 갖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도록 격려 하셨다. (5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