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3 부 오해되고 있는 본문들 조사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로마서 10:4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가 그 본문의 마지막 말, 곧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문맥이 차지하고 있는 이방인의 삽입을 그 주제로 보고 있는 죠지 하워드(George Howard)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는 기록하기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그들이 율법, 부조들,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모든 축복들을 가졌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극한 적대감은(살전 2:15, 16) 그들로 하여금 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요점, 곧 그 율법의 목적목표가 그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래서 모든 민족들이 궁극적으로 통일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잃어버린 것에 기인되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telos, 목적]이며, 그분은 곧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것의 목표이셨다.”70) (139.2)
 앞에서 고찰한 연구의 빛 속에서, 우리는 로마서 10:4로마서 9:30-33에서 시작된 논증의 논리적인 연속성과 절정, 곧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의를 구체화하고 계시기 때문에 곧 그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고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이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율법이 지적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약속된 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 자신의 의(롬 10:3)를 세우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선언하는 것과는 동떨어지게, 로마서 10:4은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의를 제공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목적이 실현된다고 확증한다. (139.3)
 로마서 10:5-8: 믿음의 순종
 누구든지 믿는 자들에게 의를 제공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는 로마서 10:4에 있는 진술을 지지하기 위해서, 바울은 5절에서 8절 사이에서 사람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공로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며, 이를 어떻게 율법이 촉구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구약으로부터 두 본문, 곧 레위기 18:5신명기 30:12-146절에서 8절에 인용하므로 발전시킨다. (139.4)
 로마서 10:5-8“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신명기 30:12-14을 의역한 것임] (139.5)
 이 구절들에 있는 주요 문제는 로마서 10:5에 있는 레위기 18:5의 인용문과 로마서 10:6-8에 있는 신명기 30:12-14의 인용문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다. 이 두 인용문들이 의의 두 보충적인 국면을 제시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의의 두 상반된 길을 제시하려는 의도인가? 통상적인 해석은 두 인용문이 의의 두 길, 즉 레위기 18:5에서 가르쳐지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와 신명기 30:12-14에서 가르쳐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대조하기 위해서 바울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전자는 인간의 순종에 기초하고 유대적인 의의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후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의를 제시하는 듯하다. (139.6)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두 잘못된 추측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는 5절6절을 소개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두 전치사인 “위하여(gar-for) ∙∙∙ 그러나(de-but)”가 대체적으로 의의 두 형태를 대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추측이 잘못된 것은 6절에서 “그러나”(but)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de)이지 알라(alla)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치사 (de)는 종종 대조하려는 의도 없이 “그리고”(and)로 번역되며, 반면에 알라(alla)는 지속적으로 “그러나”(but)로 번역되는바, 그 이유는 그 단어가 대조를 만드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죠지 호워드는 분명하고도 확신있게 지적하기를 가르(gar) ∙∙∙ (de)”“위하여 ∙∙∙ 그러나”를 의미하지 않으며, 그러나 로마서 7:8, 9; 10:10; 11:15, 16에서처럼, 그 단어들은 “위하여 ∙∙∙ 그리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71) 다른 말로는, 이 배경에서 바울은 이 전치사 틀을 의의 두 국면을 대조하려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보충하기 위한 연결 방식으로 사용한다. (140.1)
 의의 한 종류
 두 번째 잘못된 추측은 바울에 의해 인용된 두 구절을 의의 두 다른 종류를 가리키는 상반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측은 옳지 않다. 만일 바울이 레위기 18:5을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했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행위를 정확하게 수행해왔으므로, 그는 “율법에 기초한 의[한글은 ‘의의 법’으로 됨]”(롬 9:31)를 좇아간 유대인들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오해했다며 바울이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에 반대가 된다. (140.2)
 그 구절들의 본래의 문맥들에서, 두 인용문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18:5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국가들의 행습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생명을 영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권한다. 이와 유사하게, 신명기 30:11-16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그것들이 준수하기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생명의 축복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네가 생존하고 번성할 것이라”신 30:16). (140.3)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해서 신명기 30:11-14을 잘못 해석하는 자유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그렇게 했다면, 그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고 참소 하는 자신의 원수들의 합법적인 비평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도 또 어떤 성경의 저자들도 모세를 모세의 진술이나 또는 다른 성경의 진술들을 반대하도록 놓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경에서 모순되는 것들을 발견하거나 또는 구약을 그러한 진술들의 어떤 하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하는 것은 통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레위기 18:5을 인용한 직후에 신명기 30:12-14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두 구절을 상반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충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140.4)
 두 인용구의 보충적인 기능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로마서 10: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를 주시므로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고 확증한다. 5절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그는 레위기 18:5을 율법의 의를 요약한 표현, 즉 누구든지 율법이 가르치는 의의 길을 따르는 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될 것으로 인용하므로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위하여[for]-gar에 주목하라).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가 율법을 지키기 어렵도록 만든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잘못 이해되었으며, 베드로의 말을 사용한다면, 그 율법은 아무도 멜 수 없었던 “멍에를 목에 두르도록”(행 15:10) 했다. 바울은 6절에서 8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기 18:5 직후에 신명기 30:12-14을 의역하므로 이 잘못된 개념을 바로잡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으로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내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롬 10:8)기 떄문이다. (140.5)
 다니엘 훌로(Daniel Fuller)는 “모세가 가르친 율법의 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 구절 직후에 신명기 30:11-14을 의역하고(레 18:5), 또 매우 중요한 지점에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삽입시키는 모세의 이 의역을 확증하므로,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제시된 의가 믿음의 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율법의 표현이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라는 단어로 대치될 수 있었으므로, 바울은 모세 자신이 그리스도와 율법이 한 덩이라고 가르쳤다고 제시했다. 둘 중 하나이든지 아니면 둘 다이든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나누어 줄 것이므로 로마서 10:4[‘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것]의 확증은 5-8절에 있는 모세에 대한 바울의 언급”72)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141.1)
 바울은 로마서 10:6-8에서 살기 위해[레 18:5)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마치 하늘로 기어올라가거나 아니면 심연으로 기어 내려가는 것과 같이, 초인간적인 어떤 성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성취하기를 원했던 불가능한 과제를 표현하는 바울의 방식이었다. 대조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마음과 입에 있는 말씀을 통해, 즉 주님을 믿고 고백하므로 성취된다(롬 10:10). (141.2)
 신명기 30:14에 있는 말씀이 가깝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바울로 하여금 율법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신적인 은혜를,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신적인 은혜와 연결시키도록 허락했다. 신명기 30:14에 대한 그의 주석은 그가 그리스도를 율법과 복음의 실체와 내용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성 때문에, 그는 율법의 말씀을 복음의 말씀과 동일시 할 수 있었다(롬 10:8, 10). (141.3)
 율법과 복음 사이의 통일성에 대한 이해는 왈트 카이젤(Walter Kaiser)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웅변적인 질문을 입증하도록 인도했다: “무엇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의를 믿게 되기를’(롬 10:10; 참조 신 30:14) 바랐는가? ∙∙∙ 모세와 바울은 둘 다 이스라엘에 주어지고 있었던 생명은, 예나 기독교 시대인 지금이나 유효했고 또 가까이 있다는데 근본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으며; 사실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 그들의 입과 마음에 있다.”73)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통일성이 율법과 복음, 모세와 바울 사이에 있다는 것과, 이들 둘 다가 그리스도께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의 약속가운데서 율법의 목표요 절정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141.4)
 결론 (141.5)
 로마서 10:4에 대한 앞서 한 분석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end)이 아니라, 목표(goal)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은 모든 율법이 지향하는 목표이므로 의에 대한 약속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이면 경험할 수 있다. 그는 의미상 율법의 약속들, 표상들, 그리고 희생 예전들을 성취하신 자신의 인격과 사역 가운데서 율법의 목표가 되신다(고후 1:20; 롬 10:6-10; 3:21; 히 10:1-8). 그는 역시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순종하신 유일하신 사람으로서 율법의 목표가 되신다(빌 2:8; 롬 5:19롬 10:5). 그는 또한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율법의 목표도 되신다(롬 8:4).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