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3 부 오해되고 있는 본문들 조사
 뉴 인터네셔날 콤멘타리 온 더 뉴 테스트먼트(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에 나타난 본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필립 휴지스(Philip Hughes)는 기록하기를: “바울은 자신의 구주의 신실한 추종자로서 그 어느 곳에서도 율법을 경멸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선언하셨다(마 5:17). 따라서 바울의 교리의 효과는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었다(롬 3:31). 여기서 그가 율법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고후 3:6),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율법이 옛 언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24) (122.3)
 많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자들을 포함하여 안식일을 공격하기 이 전에, “율법이 옛 언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경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새 언약에 대해서 사용하신 용어들이 명백히 보여주는 것으로,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라는 선언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하나님의 내면화된 율법의 목적은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겔 11:20)는 것이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시거나 율법의 새로운 틀을 주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분께서는 실재하는 자신의 율법을 인간의 마음속에 내면화시키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122.4)
 필립 휴지스는 두 언약들 사이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차이점은 전자는 율법이 돌 비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외적인 법으로,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그 계명들을 순종하는데 실패하므로 그를 정죄하므로 직면하지만, 후자는 성령의 역동적인 회심의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내면적으로 기록되는 것이며, 율법의 준수자는 그분의 능력의 내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며, 그리고 그 말씀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25) (122.5)
 바울은 죽이는 의문과 살리는 영과의 사이를 구별하는 데로 돌아와서, 그는 율법을 시내 산에서 돌 비에 기록된 외적인 것으로, 그리고 그 꼭 같은 율법이 성령의 역사 하시는 능력에 의해 신자의 마음속에 내면적으로 기록된 것 사이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외적인 법으로서, 율법은 죄를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으로 대하고 또 정죄 한다. 그 율법의 참된 빛 가운데서 죄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드러내므로, 율법은 그것이 율법의 파괴자를 공개적으로 죽음으로 정죄하여 죽이는 것이다(롬 6:23; 5:12; 겔 18:4; 잠 11:29). 이런 면에 있어서 바울은 죽이는 의문의 편지에 대해서 놀랍도록 말할 수 있다. (123.1)
 대조적으로, 영은 신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내면화하고 또 “율법의 요구”(롬 8:4)를 따라 살도록 신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므로 생명을 준다. 그리스도께서 전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질 때,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들어가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또 율법이 그들의 마음에 살아 있도록 만든다. (123.2)
 바울은 첫 번째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의문이 죽이고 영이 살리는 것인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회심하기 전에, 율법을 자신의 의지로 지키는 자였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훼방 자요 핍박 자요 포행 자”(딤전 1:13)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율법을 범한 자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율법에 순응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마음의 부패함을 덮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순응하게 되고, 또 그가 “그 율법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게 되는 것”(롬 7:6)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그의 마음에 역사한 성령의 결과였다. (123.3)
 사망의 사역과 영의 사역
 바울은 의문과 영 사이의 대조를 두 다른 사역들, 곧 하나는 율법에 의해 제공된 죽음의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게 한 영의 사역 사이로 발전시키고 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 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7-11). (123.4)
 우선적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두 법이 아니라 두 사역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는 “봉사”나 또는 “사역” “직분”을 뜻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이다. “디아코니아”“법”으로 번역하므로, 어떤 번역서들(RSV 처럼)은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옛 언약을 죽음의 법으로 정죄하고 있다고 믿게하므로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옛 언약이나 또는 율법을 다소 악하거나 아니면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배척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율법에 의해서 마련된 죽음의 사역’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공된 영의 사역’으로 대조하고 있다. (123.5)
 죽음의 사역은 죄를 정죄하는 가운데서 율법에 의해 제공된 봉사이다. 바울은 이것을 모세가 율법을 백성에게 전달했을 때 중재되었던 “정죄의 직분”(고후 3:9)으로 부른다. 성령의 사역은 생명을 제공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도록 한다(참조 히 8:6; 9:15; 12:24). 이 두 사역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결과적으로, 영광이 따른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역이나 봉사는 분명히 영광스럽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내려왔을 때 나타났던 모세를 둘렀던 그 영광이 분명했다. 그의 용모가 너무도 밝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보는 것이 어려웠다(출 34:29, 30). (123.6)
 바울과 다른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이 언급하는 성령의 사역이나 봉사는 더 큰 영광, 즉, 영혼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영의 빛이 수반된다. 그런 봉사가 더 영광스러운 것은, 율법이 주어질 때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그 영광이 일시적이었고 또 점차 사라진 반면에, 성령의 사역에서 나오는 영광은 영원하며 또 시들지 않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 당신의 빛을 비추셨다”(고후 3:6). (124.1)
 크랜필드(Cranfield)는 이 구절들의 요점을 정확하게 요약하여 말하기를, “율법을 줄 때에 모세에 의해서 수행된 봉사가 실제로 ‘정죄’(고후 3:9)와 ‘죽음’(고후 3:7)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였을 때 영광이 함께 한 이후(모세의 얼굴의 광채-출 34:29), 그(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 설교자들)가 한 성령의 봉사는 복음을 전파할 때에 더 많은 영광이 함께 하였다”26)고 하였다. (124.2)
 바울의 목적은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율법에 의해서 그 봉사를 훼손시키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은 그가 그러한 봉사를 “영광스러운” 봉사로 부른다는 사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 즉 의의 직분은 더욱 넘치리라”(고후 3:9). 오히려, 바울의 관심은 복음을 희생시키면서 율법을 높이는 거짓 교사들의 큰 오류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들의 봉사는 사망의 봉사였는바,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그 어떤 사람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갈 2:16; 3:11). 정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복음의 영광은 율법의 영광을 능가한다. (124.3)
 여기서 주목해보아야 할 요점은 바울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그것도 전자는 거절하고 후자는 권장하여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두 사역을 대조하고 있다. 이것이 이해될 때, 그 구절은 명확해진다. 그리스도인 사역의 영광이 모세의 사역의 영광보다 더 탁월한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사역(직분)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다른 기능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24.4)
 바울이 9절에서 “정죄의 직분”“의의 직분” 사이를 대조하는 것은 분명히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 비난하거나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죄는 율법을 파기하는 것의 결과이며; 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복음은 무법이 아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정죄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해 의의 봉사를 행하는 것이다. 이 의는 성육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재와 공로에 의해서만 주어진다.”27) (124.5)
 수건을 벗은 얼굴로
 바울은 그 장의 남은 부분에서 세 중요한 기본적인 요점을 제시하기 위해서 “수건”의 주제를 활용한다(고후 3:12-18). 첫째, 모세의 사역이 은폐에 의해 표해진 반면에(“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13절), 복음에 대한 자신의 직분은 크게 열려진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수건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은혜와 자비의 직분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열려져 있다. (124.6)
 둘째, 바울은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거절했던 그 영광을 어둡게 한 암흑의 수건으로 인해서(고후 3:14-16) 그 때까지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에게 “수건”의 개념을 적용한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생각한다. 모세가 백성들의 반역과 불신을 지적하기 위해서 자신의 얼굴에 놓았던 수건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참 이해를 가리웠던 것으로, 바울에게는 상징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어두움의 수건을 나타낸다(고후 3:15). 그러나, 바울은 계속하기를,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이지리라”(고후 3:16)고 한다. 크랜필드는 정확하게 지적하기를, “율법이 폐해졌다는 암시가 없으며, 오히려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갈 때, 그들은 율법의 참 영광을 식별할 수 있다”28)고 한다. 칼빈에 의해서 적절하게 주어진 한 이유는: “왜냐하면 율법 그 자체는 밝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 율법의 찬란함을 즐기게 된다”29)는 것이다. (124.7)
 셋째, 율법의 이해를 막는 수건이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크랜필드가 설명하는 것처럼, 율법이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이해되고 성령에 의해서 그것의 참 특성이 세워질 때, 그 율법을 곡해하므로 그것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한 율법주의로부터 멀리 떠나 참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야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30) (125.1)
 앞에서 분석한 빛 가운데서, 우리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도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또 성령의 사역과 관련하여 율법의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는 율법의 직분을 영의 직분과 비교하므로 이렇게 하고 있다. 율법은 참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리고 법을 깨뜨리는 자들에게 죽음으로의 정죄를 선언하므로(롬 6:23; 5:12; 겔 18:4; 잠 11:29) 어떤 면에 있어서 죽이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영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마음에 내면화시키고 또 “율법의 요구”(롬 8:4)에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므로 생명을 준다. (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