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3 부 오해되고 있는 본문들 조사
 바울이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적인 법인 십계명의 폐지를 선언하리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여러 곳에서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고(롬 9:4; 3:2), 하나님에 의해서 기록되었고(고전 9:9; 14:21; 14:34),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으며(롬 2:17),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롬 3:21),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조화된다(갈 3:21)는 것을 확증한다. 죄가 인간의 본성에 있는 한, 율법은 그것의 사악성을 드러내는데 필요하며(롬 3:20), 구세주의 필요성을 나타낸다. (128.4)
 위에서 고찰해 본 것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바울이 한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의 언급들은 갈라디아서의 논쟁적인 특성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편지서에서, 사도는 율법, 특히 할례를 구원의 한 수단으로 격찬하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입혀진 손실을 다루고 있다. 율법에 대한 곡해와 과도한 격찬을 반박하면서, 바울은 특별히 구원의 수단으로서 도입된 할례가 관건이 된 이 후, 어떤 면에서 그 율법을 과소 평가하려는 심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128.5)
 크랜필드가 올바로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 “편지서를 제시하는 특별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것은 분명히 무비판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에서 전개하도록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견해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잡는 것은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것이 될 것은 분명하다.”37) (128.6)
 (4) 골로새서 2:14: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무엇인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골로새서 2:14에서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에서 일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을 준수할 책임 하에 있지 않다고 믿는다. 이 결론은 특별히 영어흠정역(KJV)으로부터 이끌어 온 것으로,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를 거스리는 손으로 쓴 법을 제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것을 버리셨다”(역자의 직역임)로 읽는다. “손으로 쓴 법”이라는 구절은 이른바 십자가에 못박은 모세의 법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된다. (129.1)
 바울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제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대중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가? 십자가에 못박힌 “기록된 문서”(cheirographon)는 일반적으로는 율법을, 그리고 특별하게는 안식일인가?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되고 있는바, 즉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포함하여, 모세의 율법의 모든 법들을 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129.2)
 이런 대중적인 해석은 적어도 두 이유에 있어서 보증을 받지 못한다. 첫째는, 로지(E. Lohse)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편지서의 전체에서 율법이란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제시할 때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 율법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도 없다.”38) (129.3)
 두 번째는 이런 해석이 하나님의 용서의 충만하심을 입증하기 위해 고안된 직접적인 논증으로부터 벗어난다. 도덕적인 법 또는 의문의 법의 제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보증을 거의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다. 죄의식이 율법의 법령을 파괴하므로 제거되지는 않는다. 후자는 단지 인류를 도덕적인 원칙들이 없는 상태로 버려 둘 뿐이다. (129.4)
 골로새서 2:14의 논쟁
 골로새서 2:14의 법적인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골로새서에 있는 거짓 교사들을 대항하기 위해 앞서 나온 구절들에서 바울에 의해 제기된 논증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자칭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에 동참하는데 자신들을 도울 수 있다는 우주적인 존재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금욕적인 규정들(dogmata)을 준수할 필요가 있었다고 믿는 “공교한”(골 2:4) 그리스도인이었다. (129.5)
 이러한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 바울은 두 중요한 진리를 강조한다. 첫째,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며”(골 2:9), 모든 다른 형태의 권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골 2:10)이신 그분께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두 번째, 사도는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만이 신자는 생명의 충만함(골 2:10)에 이를 수 있는바,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골 2:9)을 소유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구속”“죄의 용서”의 충만함을 마련하시기도 하신다(골 1:14; 2:10-15; 3:1-5). (129.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완전하심”(골 1:28)과 “충만하심”(골 1:19; 2:9)을 신자에게로 확장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율법에 호소하지 않고 침례에 호소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혜택을 그리스도인들에게로 확장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시다(골 2:11-13). 침례의 혜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는”(골 2:13)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는”(골 2:13; 1:14; 3:13) 것으로 분명하게 제시된다. (129.7)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달성되었고 또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장된, 하나님의 용서의 충만하심에 대한 재 확증은 우주의 정사와 권세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므로 완전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대답을 담고 있다. 13절에서 분명하게 묘사된 하나님의 용서의 확실성과 충만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도는 14절에서 하나님을 “의문에 쓴 증서(cheirographon)를 십자가에 못박아 도말하고 제하여 버린” 심판자로 묘사하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129.8)
 십자가에 못박은 의문에 쓴 증서
 십자가에 못박은 “의문에 쓴 증서-cheirographon는 무엇인가? 바울은 의문의 법으로 된 모세의 율법, 즉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언하고 있는가? 만일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에 못박은 다른 법들 가운데 안식일도 포함될 수 있다는 합법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130.1)
 이것은 본 연구의 과정에서 다루어 온 안식일을 반대하는 문헌들 가운데서 옹호되는 실로 인기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문법적인 난해함39) 외에도, 허비(J. Huby)가 기록한대로,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을 ‘거룩한’(롬 7:6)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분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40) 더 나아가, 이 견해는 하나님의 용서의 충분하심을 입증하기 위해 의도된 바울의 논증으로부터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끌어내리는 것이 된다. 도덕적인 율법과 의문의 율법을 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보증을 마련해주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류로 하여금 도덕적인 원칙들이 없는 상태로 버려 둘 뿐이다. 죄의식은 법의 조항을 깨뜨리므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130.2)
 최근의 조사연구는 케이로그라폰(cheirographon)이란 용어가 우리의 범죄의 결과로부터 “탕감하는 증서”나 또는 인류의 정죄를 위해 사용된 “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41) 실제적으로 유사한 두 의미는 랍비와 묵시 문헌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42) 이 견해는 “의문에 쓴 증서를 [중앙으로부터] 도말하시고”(골 2:14)라는 구절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중앙”은 참소 하는 증인에 의해 법정이나 의회의 중심부가 점유 당하고 있는 위치였다. 골로새서의 문맥에서, 참소하는 증인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법정으로부터 지워지고 제거된 “죄가 기록된 책”이다. (130.3)
 십자가에 못박힌 “의문에 쓴 증서”가 모세의 법이라는 견해를 지원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유사한 본문인 에베소서 2:15“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에 호소한다. 그러나 두 본문 사이의 유사성은 외관상으로 매우 그럴 듯 하다. 우선 첫째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계명의 율법”이란 구절이다. 둘째는, 에베소서에서 여격인 “엔 도그마신”(“계명 안에,” en dogmasin-in ordinances)이 “엔”(안에, en-in)에 의해 지배를 받으므로, 따라서 율법이 “계명 안에서” 제거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런 전치사는 골로새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30.4)
 마지막으로, 문맥이 실제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에베소서의 의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을 분리시킨 것을 제하셨는가 하는 것인 반면에, 골로새서의 의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충분한 용서를 마련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그분께서 “중간의 막힌 담”(엡 2:14)을 허무시므로 성취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성전 안 뜰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방인의 뜰을 성소로부터 나누는 벽을 암시하고 있다.43) (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