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3 부 오해되고 있는 본문들 조사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 있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인간의 공로에 기초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에 기초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므로 대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따른 이방인들의 삽입은 성경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롬 9:6-29). 호세아의 글에서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롬 9:25)고 하였다. (136.4)
 두 번째,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할 것이 성경에 계시되었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나타난(롬 9:30에서 10:21)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그들이 실패한 데서 오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이스라엘은 그 자신의 의를 세우고자 했다(롬 9:31; 10:3). (136.5)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단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패를 이방인들의 삽입과 또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셨다(롬 11:1-36).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26). (136.6)
 로마서 10:4에 대한 더 넓은 문맥의 솔직한 개요는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가 율법과 복음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에”(롬 10:12)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어떻게 수행하시고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부가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0:4을 문맥과는 거리가 먼 “율법과 복음”의 논쟁에 기초하여 해석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공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6.7)
 로마서 10:4의 직접적인 문맥
 로마서 9:30에서 10:13의 부분은 일반적으로 로마서 10:4의 직접적인 문맥으로 간주된다. 바울은 관례적으로 로마서에 있는 자신의 논쟁의 다음 단계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롬 9:30)라는 구절을 언급하므로 신호를 보낸다. 그가 로마서 9:30에서 10:13에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이것으로서 의를 추구하며 경주를 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의를 얻고, 한편으로 율법에 의해 약속된 의를 얻으려고 경주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136.8)
 바데나스는 로마서 9:30에 있는 바울의 논증을 편리하고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는 기록하기를,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이고 실체이며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성경(eis nomon ouk ephthasen-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롬 9:31)을 통해서 이해하지 못했다고 제시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토라[Torah, 모세의 율법]를 보면서-인간의 행위에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법문-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은혜의 관점으로부터 보아야할 중요성을 경시해버렸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 자신의 율법을 심각하게 보지 못하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른 말로, 토라[모세의 율법]에 대한 오해가 그리스도에 대해 율법이 증거(참조 롬 9:31-33; 10:4-13; 3:21)하는 것에 소경이 되어 있었다고 바울에 의해 제시되고 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68) (137.1)
 직접적인 문맥에서, 바울은 율법을 경시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의를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을 비평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극도의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의 열성이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롬 10:2).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에 무지하므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롬 10:3) 노력했다. (137.2)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율법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그들의 오해와 오용(誤用)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약속된 의를 얻지 않았는바, 그 이유는 그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개인의 성취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롬 10:2, 3; 2:17, 27; 3:27; 4:2).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율법 속에 나타난 의를 얻는 대신에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고집했다. 그들은 특별히 약속된 메시야의 강림을 통해 계시된 의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그들 자신을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대신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무엇을 행해야하는 지를 보았다. 그들은, 바울이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137.3)
 로마서 10:4: 목적인가 종료인가?
 바울은 4절에서 자신의 논증을 계속한다.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는 다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서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 이 중요한 본문은 접속사인 “위하여”(for-gar)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울의 사상의 흐름 가운데서 지속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의 이러한 본문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해 약속된 의를 얻는데 실패한 것을 다루고 있는 직접적인 문맥의 빛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37.4)
 헬라어의 주요 문장은 “텔로스 노무 크리스토스”(telos nomou Christos)로 읽으며, 그것의 문자적인 번역은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이다]”를 의미한다. 시작에서 텔로스 노무로된 문장의 구조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다는 율법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로마서 9:6 이 후, 특히 로마서 9:31에서 그가 노모스 디카이오수네스(nomos dikaiosunes), 즉 의의 율법, 곧 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율법에 대해서 말하면서, 율법(nomos)이 바울의 논의의 중심이 되어 왔다. (137.5)
 중간 문맥에서,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가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서 있는 것으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로마서 9:31에서 그는, 만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돌”)를 믿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의를 약속하고 있는 율법을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직접적인 문맥의 빛에서, 그 율법(노모스-nomos)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지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증거를 나르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일관적이다. 폐지 해석(“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은 자신의 주요 사상의 흐름을 붕괴시킬 것이며, 또 텔로스“종료”보다는 오히려 “목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익숙한 로마에 있는 자신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138.1)
 중간 문맥에서 사용된 경기에 대한 비유(롬 9:30-33) 역시 텔로스“목적”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바, 그 이유는 텔로스가 결승점이나 또는 마지막 선을 의미하기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해서 사용되는 또 다른 경기의 용어는 목적을 향한 열렬한 추구를 의미하는 디오콘(diokon, 롬 9:30, 31);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카테라벤(katelaben, 롬 9:30), 경기에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을 뜻하는 우크 에프따센(ouk ephthasen, 롬 9:31), 패배의 실망과 수치를 표현하는 카타이스쿠노(kataiskuno, 롬 9:33) 등이다. (138.2)
 경기의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바데나스가 다음과 같이 잘 제시하고 있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므로, 디카이오수네[dikaiosune, 의]의 결승점에 도달했고, 하나님의 새 백성(롬 9:30)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므로 율법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논리적인 결론은 로마서 10:4이 말하는 것으로서, 곧 율법과 디카오수네[의, righteousness]의 결승점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리스도 안이 아니고는 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다.”69) (138.3)
 한정적인 구절: “의를 위하여 ∙∙∙ ”
 신학적인 해석을 위한 더 나은 지지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롬 10:4)라는 한정적인 구절에 의해서 마련되어 있다. “의를 위하여”라는 구절은 헬라어 에이스 디카이오수넨(eis dikaiosunen)을 번역한 것이다. “안으로”(into) 또는 “위하여”(for)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전치사 에이스(eis)가 방향 적이고 목적 적이므로, 그 단어는 본문의 목적론적인 해석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것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의 안에 있는 율법의 목적이다”라고 읽을 수 있다. (138.4)
 이런 해석은 그 본문과 잘 조화되며, 그리고 문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은 것”(롬 9:6), 이방인이 의를 얻은 것(롬 9:30), 이스라엘이 율법에 “이르지 못하고”(롬 9:31), 부딪히는 돌에 부딪힌 것(롬 9:33),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경홀히 여긴 것(롬 10:2, 3) 등의 중요한 요소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다. 만일 로마서 10:4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약속한 것에서 그 율법이 이해된다면, 이 모든 주제들은 그리스도를 지적하기에 적당한 것들이다. (138.5)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율법을 믿을 사람에게 의를 가져다주는 의의 한 길로 끝내셨다”고 하는 폐지 해석은 그것을 반대하는 논증의 흐름과 수고를 방해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믿음에만 기초하고 있는 의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마치셨다”라고 말하는 해석과도 꼭 같다. 이러한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의가 율법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었으며, 또 그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실현하는데 말할 수 없이 큰 장애물이 되었으므로, 결국 그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잘못된 추측을 하는 것이다. (138.6)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구원의 한 길로 끝내셨다는 추측은, 구원은 결코 율법에 의해서 올 수 없었다(갈 2:21; 3:21)라고 보는 바울의 견해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른 구약의 의로운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롬 9:30-33 참조). 이스라엘이 부딪혀 넘어진 돌은 그리스도이셨다(고전 10:4 참조).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데 장애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9:31; 3:21, 31). (1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