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제 3 부 오해되고 있는 본문들 조사
 (3) 갈라디아 3:15-25: 믿음과 율법
 아마도 갈라디아서 3:15-25은 바울서신의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고 믿도록 잘못 인도해 온 구절이다. 그 이유는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독립적으로 취하므로 다소 부정적인 진술을 하여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을 끝내셨다고 믿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5.3)
 이 구절들을 점검하기 전에,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 자신의 이 편지서에서 그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리스 말틴(Brice Martin)은 자신의 학위 논문인 바울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율법(Christ and the Law in Paul)의 결론에서 이 중요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서에서 다양한 입장에 직면했다. 갈라디아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율법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그들의 시도 때문에 율법을 경시하려는 듯이 보인다.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율법 폐기론 자들을 직면하면서 율법과 도덕적인 가치를 강조한다. 로마서에서 그는 균형진 진술을 제시하고 또 자신은 율법 폐기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31) (125.4)
 갈라디아인의 위기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의 억양이 자신의 긴박한 회심에 대한 의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을 “요란케 하고,” “꾀이고,” “어지럽게” 하기 위해 왔다(갈 1:7; 3:1; 5:12). 분명히 그것들은 자신의 회심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잘못 인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의 축복은 할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때에만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마치 그 믿음이 할례에 기초하고 있을 때만 가치 있다는 것이다. (125.5)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의 준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풀어놓으므로 복음을 타협하고 흘려 버린다고 저주하였다. 그의 복음은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높인 예루살렘의 형제들과는 맞지 않았다. 자신의 사도적 신분과 갈라디아에서의 사명이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예리한 언변의 단도를 던지므로 응수한다. “고지식함(갈 1:6)은 어리석은 갈라디아인(갈 3:1)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원칙이다. 비겁함이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불어넣는다(갈 6:12). 유혹이 넘어지게 하는 자들의 술책이다(갈 4:17). 골자를 빼 버리는 것이 그들의 정당한 공로이다(골 5:12).”32) (126.1)
 선동 자들의 기별은 근본적으로 할례의 요구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바울의 다음의 경고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갈 5:2).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전파된 “다른 복음”의 주요 교리인 할례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그들의 동기를 노출시키므로 지적되고 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 13). (126.2)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강조하는 것은 할례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한 지체가 되고 그것의 축복을 받는데 있어서 할례가 필수 조건이라는 유대인들의 편만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히 준행하고(창 26:5), 그리고 할례가 그 언약의 표징이었기 때문에 그와 약속의 언약을 맺으셨다. (126.3)
 바울의 반응
 자신의 반응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의 언약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이 할례의 표징이 주어지기 (before)에(창 17:9-14) 그의 믿음의 반응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논증하므로(창 15:6; 갈 3:6) 반대자들의 논박을 그 표제로 돌린다. 모든 개연성 가운데서, 거짓 교사들은 할례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고 제시하므로 창세기 17장에 있는 할례의 제도에 호소했다. 바울은 창세기를 가리키면서- 물론 창세기 17장이 아니라 창세기 15:6로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를 지적한다. 이 구절로부터 바울은: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라고 결론을 내린다. (126.4)
 바울의 논증을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으로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의 전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제정하시기 전에 그의 믿음으로 의롭게 하셨다.

   두 번째 전제: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축복을 받는다.

   결론:

 따라서, 아브라함 안에서 축복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어떤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되는 것) 할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126.5)
 바울은 이 논증을 430년 후에 일어난(갈 3:15-18)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에 반대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창 18:18에서)을 제시하므로 더 발전시킨다. 헬라어에서 디아데케(diatheke)라는 단어가 성약과 언약 모두를 의미할 수 있으므로, 바울은 유효한 인간의 약속이 후자의 첨부로 말미암아 희생될 수 없으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믿음에 기초한 약속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의를 행위로 말미암아 획득할 수 있는 의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127.1)
 그와 꼭 같은 사상이 할례의 표징이 주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다고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에서 표현되고 있다(롬 4:1-5). 그 후, 할례는 실제의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하는 믿음의 표징이거나 또는 인이 되는 것이다(롬 4:9-12). 엘돈 래드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갈라디아서 3장로마서 4장에 있는 사상의 흐름은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을 신뢰하고 율법을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보증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율법 아래 있었지만 행위로부터 떠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로 간주하심을 받은 사람에게 축복을 선언 받은 다윗의 경우에서 분명해진다(롬 4:6, 7).”33) (127.2)
 옛 언약 아래에서도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경우들이 다음의 바울의 진술을 주석하는데 우리를 도와준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 오는 것(coming)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하는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활용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의 선포와 동일한 역사적인 의미에서 “믿음”을 사용한다(갈 4:4, 5; 롬 1:16, 17). 구원은 옛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았으나, 백성들이 율법을 그들 자신의 의와 자랑의 기초로 만들었을 때 믿음은 방해를 받았다. (127.3)
 만일 구원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에 의해서라면,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에서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바울의 대답은 유대교에 고상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유대교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 이기도하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갈 3:19)이다. 그 율법은 사람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범죄의 죄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가된 것이다. “범죄”(parabasis)라는 용어는 어네스트 벌톤(Earnest Burton)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악한 충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법을 범하는 것”34)이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드러내므로, 율법은 한편으로는 알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행위의 죄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127.4)
 이 문맥에서,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율법이 높여지는 것을 좌절시키기 위해 좁은 의미에서 죄를 폭로하는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으로 말한다.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한 세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되는 것처럼 곡해하는 교사들과 논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반박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값없이 주어진 양자의 언약으로 은혜를 입었지만, 그는 종종 협소한 의미에서 그 율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제시한다.”35) (127.5)
 후견인으로서의 율법
 좁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떠난 것처럼 보여진 “벌거숭이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있었던 하나의 후견인이었다. ‘약속된 자’에게 ‘씨’가 단번에 오시므로 율법의 목적, 의미, 실체가 되시는 구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율법을 노골적으로 벌거숭이 율법으로 간주할 만한 여지가 더 이상 없다(비록 금지하는 벌거숭이로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서 기여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값없이 주어진 양자의 언약으로 진정한 특성에서 은혜를 입거나 또는 옷 입는 것으로 이해된다.”36 (128.1)
 “벌거숭이 율법”의 기초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 율법을 로마와 헬라 집에서 이린이들의 보호자인 몽학 선생(paidagogos)에 비유한다. 보호자의 책임은 어린이를 학교에까지 데려 다 주며,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그들이 잘못 취급되는 것으로부터 지킨다. 몽학 선생의 역할은 구약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보호자와 후견인의 역할을 감당한 율법의 어떤 국면을 적절하게 예증한다. 예를 들어, 바울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문제인 할례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헌신하는 언약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보호자의 역할을 했다(수 5:2-8). (128.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인의 속박으로부터 불러내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죄의 사악성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십계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의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시기 위해 고안된 의식들과 종교적인 법들을 주셨다. 실제로, 이런 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영적인 구원의 날이 올 때까지 백성들을 보호하고 안내하는 기능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의식적인 법과 희생 제사의 법들이 끝났지만, 그러나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의 공의로운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4)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십계명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다(히 8:10). (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