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안식일 준수의 의미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안식일에 세속적 활동을 중지할 것만을 촉구했는가. 그는 히브리서의 교회가 유대교의 관습을 채택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으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히브리서를 통하여 바로 이 경향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가 히브리서에서 육체적 노동의 중지만으로 안식일 준수로 일삼으려 하는 그들의 기존 경향을 강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만 강조한다면 안식일 안식의 소극적인 사상만 강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기존하는 부정적인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 외에 다른 의의가 없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의 기자는 안식일에 안식하는 행위에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222.2)
 안식일 준수의 더 깊은 의미는 믿음과 순종에 있었다. 광야의 세대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저들이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고(히 4:2) 이 불신으로 인해 불순종했기 때문이었다(히 4:6,11). (222.3)
 히브리 기자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일을 쉬는 것은 단순히 틀에 박힌 예전을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었다(마 12:7). 그것보다는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려는 정신은 사람의 심령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히 4:7)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게”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려면 행함에 의존하지 말고 믿음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히 4:2,3,11). 존 칼빈이 적절히 표현했듯이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저희 안에 들어와 일하시도록 자신들의 마음을 비워드리기 위하여 안식일에 그들의 일을 중지하는 것이다.10 (223.1)
 히브리서 기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히 4:9)은 신자들이 빈들거리며 허송하는 한 날이 아니라 매 주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용하는 새로운 기회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안식에 동참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세상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다. 안식일에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은혜는 현재로 고갈되는 것도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 4:11)고 하였다. 우리의 안식일 안식의 경험이 미래로 확장됨으로써 우리들의 안식일 안식 경험은 자주 “이미”“아직”의 긴장으로, 구원의 현재적 경험과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되게 된다. (223.2)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 준수를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너무 지나치게 물질적인 시각으로만 안식일 준수를 생각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쪽으로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안식일 안식이 뜻하는 항구적인 축복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구속의 현재적 경험을 뜻하는 안식일 안식과 하나님이 “이미 믿는 자들에게” 제공하시는(히 4:3) 구원의 미래적 회복을 뜻하는 안식일 안식의 본성을 강조하려 하였다. (223.3)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준수는 단순히 제칠일에 일을 중지하는 육체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오늘날”이라 일컬어지는 그 날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경험을 뜻한다. 칼 바르트가 웅변적으로 강조하였듯이 안식일에 쉬는 행위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을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말이며 마지막 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모든 노력을 단념하는 행위인 것이다.11 (224.1)
 안식일 안식에 대한 히브리서의 해석은 대부분에 있어서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의 구속적 이해와 일치한다. 백성들이 오래 기다려온 안식년의 “자유”(눅 4:18)와 “쉼”(마 11:28)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제공되는 “안식일 안식”(히 4:7, 9)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안식일 안식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신다”(요 5:17)는 그리스도의 주장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히 4:11)는 히브리서의 권고 안에 반영되고 있다. (224.2)
 히브리서 4장이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순례의 끝에 실현될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날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도교회에서도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로 이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24.3)
 5. 신약교회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
 안식일을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라는 좀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켰는가?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안식일 예배를 위해 안식일마다 유대 회당에 출석하였다(행 13:14,43,44; 17:2; 18:4).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만의 예배 장소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마태는 그리스도가 “저희의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말하고 있다(마 12:9). 따라서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이미 그리스도의 무리가 별도의 예배 장소를 마련하는 일을 시작했는지 모른다. (225.1)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위하여 유대교도들과 분리하여 예배드릴 별도의 예배 공간을 마련하려 했던 것만이 아니라 안식일 신학에 있어서도 유대교와의 차별을 시도하였다.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논쟁들 자체가 이러한 사실의 한 반영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본에 따라 안식일을 해석하고 지키려 하였다. 따라서 안식일을 둘러싼 두 집단간의 논쟁의 쟁점이 안식일을 주로 “제사”를 위한 날로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어려운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날로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마 12:7). (225.2)
 안식일은 착한 일을 하는 날
 복음서 기자들은 안식일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고 “착한” 일을 함으로써 메시야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방식을 옹호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모본과 교훈에 호소하였다. 예컨데 꼬부라진 여인의 치료에서 누가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두 개의 개념을 대립시켰다. 하나는 회당장의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태도였다. 회당장에게는 안식일 준수의 중심 문제가 사랑하고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고 지켜야 할 종교적 규칙들이었다(눅 13:14). 그런데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해방과 영적인 해방을 제공하는 날이었다(눅 13:12, 16). (225.3)
 그리스도는 안식일에도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유대교의 습관에 호소함으로써 회당장의 잘못된 안식일 신앙 관념을 시정하고자 하셨다. 안식일에 동물의 일상적 필요를 제공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은 더더욱 합당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눅 13:16). (226.1)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이해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치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네 복음서 중 세 공관복음이 모두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막 3:1-6; 마 12:9-14; 눅 6:6-11). 이 에피소드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치료하는 행위의 합법성에 대하여 따지자,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되물었다(막 3:4; 눅 6:9). (226.2)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사 중에 주목되는 하나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 질문자들이 사용한 “치료”(데카퓨에인)라는 동사 대신에 “선을 행하는 것”(아카토포이에인)과 “구(구조)하는 것”(소제인)이라는 다른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하셨다는 것이다. (226.3)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어를 바꾸어 대답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치료같은 단 하나의 박애 활동만을 안식일의 합법적인 활동으로 국한시키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박애 활동들을 안식일 계명의 선한 의도 속에 포함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227.1)
 안식일, 박애적인 봉사의 날
 마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너희 중 어느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12)라는 추가 질문을 제기하심으로써 안식일을 박애적인 봉사의 날로 생각하는 원칙에 대해 예증적으로 설명하셨다. 원칙적인 질문과 예증적인 설명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생명들에 대해 관심과 동정을 베풂으로써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날이라는 안식일의 근원적인 가치를 드러내주셨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신자들은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멸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