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안식일의 번영
 태초의 안식일을 특징화했던 물질적 번영과 풍요로움 역시 메시야 시대의 물질적 풍요를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아모스는 외치기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하였다(암 9:13).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이사야(4:2; 7:22; 30:23-25), 요엘(4:19), 스바냐(3:13), 예레미야(30:19; 31:24), 그리고 에스겔(34:13,14; 47:12)에도 나타나고 있다. (184.1)
 후기 유대 문헌들과 기독교 문헌들에서도 우주적인 안식일과 자주 동등시되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관한 묘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바나바스의 서한”(c. A.D. 135)에서도 6천 년 후에 도래할 천년을 우주적 안식일이라고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평화와 번영을 그 특징으로 묘사하였다. (184.2)
 안식일의 안식과 풍요로움이 미래 시대를 상징하였기 때문에 샴마이 학파의 랍비 전통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동냥을 주는 것을 금하고 심지어는 고아에게 지참금을 주는 것까지금하였다. 안식일의 자선 행위는 메시야 시대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표상을 부인하는 행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184.3)
 안식일의 기쁨
 에덴의 안식일에 아담이 누렸던 기쁨과 즐거움도 메시야 시대를 위한 예언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사야서에서는 안식일을 언급하는 여러 구절들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연결되고 있다(사 56:1-7; 58:13,14; 66:20-24). 이사야가 “즐거움”(오넥), “존귀”(카보드) 같은 말을 안식일과 메시야 때를 묘사하면서 사용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사 58:13; 66:11). 마지막 시대의 특징이 될 즐거움과 기쁨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지키고 있는 이 안식일에도 누릴 수 있다는 암시가 분명하다. (184.4)
 “안식일의 즐거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에덴의 안식일 개념에서 나온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쁨, 빛, 조화, 평화의 날인 안식일은 메시야 시대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나타났다. (185.1)
 안식일의 빛
 안식일의 즐거움은 특별히 안식일에 불을 밝히는 유대 민족의 전통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유대 여성들의 특권으로 여겨지고 있는바 안식일에 불을 밝히는 이 행위는 하나님께서 금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밤까지 36시간 동안 비추게 하신 특별한 불빛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36시간 동안 불을 밝히신다는 결론은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이름 부쳐진 시편 92편의 제목에 대한 랍비들의 교묘한 해석에서 유래하였다. 즉 안식일은 어둠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날이며 또 창세기 1장의 다른 날들에 대해서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표현되었지만 안식일에 대해서는 “저녁”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안식일의 빛은 36시간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이다.3 (185.2)
 구약성경의 옛 유대 주석인 미드라쉬(Midrash)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었다”(창 2:2)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빛의 축복으로 제칠일을 축복하셨다고 해석했다.4 (185.3)
 유대의 전통에 소개되고 있는 태초의 안식일의 구속적인 역할은 매우 인상적이다. 안식일은 카오스에서 완전한 코스모스를 이끌어낸 원초적인 구속의 상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이루어질 메시야적 회복을 능히 상징할 수가 있었다. 안식일에 불을 밝히는 전통은 태초의 안식일에 아담에게 구원의 보증으로 비추었던 초자연적인 빛과 메시야 시대에 비추게 될 특별한 빛을 상징함으로써 두 시대를 연결하고 있다. (186.1)
 예언자들은 미래에 찬란히 비칠 빛의 출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7배나 밝게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 30:26) 하였다. “일곱 날의 빛”은 창조 때의 일곱 날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스가랴 선지자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 빛이 있으리로다”라고 예언했다(슥 14:7). 아마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 언급되어 있지 않은 첫 번째 제칠일 안식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이 태초의 안식일에 대하여 자세히 해석하는 것은 모두 안식일을 초자연적이고 계속적인 빛에 의하여 특별히 복받은 날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186.2)
 태초의 제칠일 안식일에 대한 묘사 중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최초의 제칠일은 문자적인 24시간의 제칠일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유대의 전통은 언제나 제칠일을 특별한 빛의 축복을 받은 24시간의 하루로 이해하였다. (186.3)
 안식일 안식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이 행복, 고요, 평화, 조화와 같은 것5이라고 설명한 안식일 안식의 주제도 메시야 시대를 위한 훌륭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쉼 곧 안식의 개념은 국가적인 열망과 메시야적 열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국가적 열망으로서의 안식일 안식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평화롭게 사는 삶을 유형화하는데 사용되었다(신 12:9; 14:3; 25:19). 임금이 백성들에게 “대적을 파하여” 백성을 평안히 거하게 하는(삼하 7:1) 나라가 안식의 땅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시온에 있는 그의 성전 안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쉴 곳”을 찾을 수 있는(대하 6:41; 대상 23:25; 시 132:8,13,14; 사 66:1) 나라가 안식의 땅이다. (186.4)
 정치적 “안식”(메누하)에 대한 이러한 언급들은 차별적으로 안식일 안식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적 안식을 위한 큰 열망을 유형화하는 모델로서 제칠일 안식일 안식의 경험이 이용된 것도 사실이다. 이사야는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다”(사 32:18)고 예언하고 있는데 이사야가 메시야 시대의 “안전과 조용히 쉬는 곳”은 모두 안식일 안식의 관념과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87.1)
 안식일 안식과 국가적 안식의 결합은 히브리서 4장 4, 6, 8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서 창조의 안식일 안식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약속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다. 광야의 세대는 안식일로 유형화된 그 안식의 땅에 불순종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6절). 후에 여호수아의 지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으나(8절) 이로써 안식일 안식의 축복이 다 성취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고”(히 4:7) “그의 안식”으로 들어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187.2)
 안식일 안식의 축복이 안식과 평화라는 정치적 조건만으로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과 함께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안식일 안식의 미래적 성취를 바라보고 기다리게 하였다. (188.1)
 우리는 유대 문헌들에서 안식일 안식과 시간의 일곱 구조가 메시야 시대의 안식과 평화와 구속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된 수많은 실례들을 보게 된다. 예컨대 바벨로니아 탈무드에서는 “우리의 랍비들이 안식일의 끝에 다윗의 아들이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수많은 안식일들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6 하였다. 메시야의 시대는 자주 안식년의 안식으로도 묘사되었다. 미쉬나 타미드의 끝에서 “시편, 안식일을 위한 노래-즉 앞으로 나타날 시대를 위한 노래, 영원한 생명 안에서 모든 것이 안식일 안식인 그 날을 위한 노래”7라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안식일 안식의 경험이 미래에 다가올 메시야적 평화와 안식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키워주었다는 예들의 일부이다. (188.2)
 안식일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