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는 히브리서 4장 1-11절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4장 1-11절에서 창조 때에 하나님이 쉬신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안식과 평안에 결부시키기 위하여(히 4:4) 안식일의 종말론적 인식을 끌어내고 있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안식일 논의는 신약의 교회에서 안식일 신앙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16.3)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과 주님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 2절시편 95편 7, 11절을 하나로 묶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성경절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창조 때에 하나님이 쉬시고 그 백성에게 제공하신 안식일 안식(히 4:4)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가나안의 안식처에 정착함으로써도 다 고갈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시편 95편 7절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정착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간 후에” 다윗을 통하여 다시 그의 안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7; cf. 시 95:7).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일 안식은 아직도 더 풍성한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데(히 4:9), 이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의 새벽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의 제칠일 안식일에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의 “복된 소식”(히 4:4)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하려면 마땅히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히 4:3,10,11). (217.1)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인가 비유적인 안식일 준수인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안식일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안식일을 준수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단서가 히브리서 4장 1-11절에 나타나 있는가.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 근거하여 이 성경절에는 “히브리서” 교회가 실지로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217.2)
 첫째 이유는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일의 실천적인 준수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안식일 안식의 영속화된 사실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히 4:9)이 안식일 안식의 미래적인 실현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라는 권고(히 4:10,11)는 현재의 안식일 준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이유로는 히브리서 기자가 여러 차례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일부 제도들이 “낡아지고 없어지게 되었다”(히 8:13; 7:11; 9:28)고 주장했는데 안식일도 그 “없어지게 된” 제도들의 하나라는 것이다. (217.3)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유는 모두 정당한 이유들이 못된다. 사실에 근거한 이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건 상관 없이) 안식일을 위시한 유대교 예식 신앙에 깊이 밀착되어 있던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의 관습화된 일상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하는 것이 전혀 불필요한 일이었다. 떠나온 유대교로 다시 돌아오라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던 히브리서 교인들이 실지로 필요했던 것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신앙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강림에 비추어 이해하는 일이었다. (218.1)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일 안식이 일차적으로 미래의 사건으로 논의되었고 안식일의 현대적 준수와는 무관하다는 두 번째 이유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히 4:9)은 일차적으로 “이미 믿는 우리가 들어가는”(히 4:3) 현재의 안식일 안식이다. “들어간다”(히 4:3)는 동사는 현재시제이다. 그리고 희랍어에서도 이 동사는 “안식”의 현재적 경험이 강조되는 문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같은 성격은 히브리서 4장 9절“남아 있다”라는 동사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218.2)
 우리가 이같은 구체적인 문맥과 관계 없이 안식일 안식을 말한다면 미래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히브리서 4장의 구체적인 문맥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안식일 안식의 현재적 영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목적 때문에 여호수아의 시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히 4:8). (218.3)
 폐했는가 남아 있는가
 이 문제는 앞의 세 번째 이유 즉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될 구속적 안식의 구약적 그림자와 모형이고 따라서 그 기능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종식되었다는 주장과 관련된 것이다. (219.1)
 과연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이 성전이나 그 봉사처럼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그 수명을 다했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는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더욱 새로워지고 확대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219.2)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제사 제도가 확실하게 단절되었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히브리서 7장부터 10장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과 그에 후속되는 하늘 성소의 봉사로 말미암아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그들의 성전 봉사의 모형적 기능이 얼마만큼 철저하게 대체되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성전 봉사들을 “폐하셨다”(히 10:9). 그리스도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것들은 “쇠하여지고 없어지게 되었다”(히 8:13).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똑같은 식으로 안식일이 폐해졌다고 주장했는가. 히브리서 본문을 통해서는 이같은 주장을 도무지 입증할 수가 없다. 사바스티스모스 곧 안식일 안식은 히브리서에서 성전이나 그 봉사와 같이 “폐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히 4:9) 하나님의 축복으로 강력하고도 분명하게 기술되고 있다. “남아 있다”(아폴레이페타이)라는 동사는 현재 수동시제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뒤로 남겨져 있다”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서 4장 9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한다면 “그래서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뒤로 남겨져 있다”가 될 것이다. (219.3)
 안식일과 성전 봉사의 대조는 너무나 현저하다. 성전 봉사는 “폐했고” 안식일은 “뒤에 남겨져”있다. 따라서 안식일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와 유사한 대조는 마태복음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때맞추어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전 봉사가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안식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전혀 판이하게 주장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앞으로 안식일에 도시에서 도망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라(마 24:20)고 하셨다. 안식일 준수의 영속성을 당연시하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220.1)
 히브리서 4장 11절“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라”는 권고는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일 준수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안식일의 “안식” 경험이 현재로 다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그 실현이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220.2)
 안식일 안식이 현재의 안식뿐만 아니라 미래의 안식 경험까지 대표한다는 히브리서 교인들의 안식일 안식관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후기 유대문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위의 문헌에서도 안식일은 개인의 현재적 안식의 경험이 사회적 불의로부터 해방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에 의하여 실현될 미래의 안식과 평화에 대한 기대를 뜻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 나름으로 구약의 안식일 안식을 기독교적 토대에서 재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안식일은 구원의 현재적 안식을 경험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하늘 가나안에서 누릴 궁극적인 쉼을 고대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220.3)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인가 영적인 안식일 준수인가?
 그러면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안식”(히 4:9)의 본질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와 영적인 안식일 준수의 어느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 본문에는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시로서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의도하고 있다는 두 가지 중요한 단서들이 들어 있다. (221.1)
 첫 번째 단서는 히브리서 4장 9절에 있는 “안식하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뜻의 “사바티스모스”라는 단어의 용례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도 히브리서 4장 9절에서만 딱 한 번 나타나고 있는데, 기독교 문헌과 세속의 일반적인 문헌에 똑같이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히브리서 4장 9절“안식일 준수”라는 의미의 “사바티스모스”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221.2)
 두 번째 단서는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고 하여 안식일 안식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일을 중지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히브리서 4장 10절“일을 쉰다”는 말의 뜻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죗된 활동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준수는 제칠일에 일상의 일을 중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죗된 활동을 자제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221.3)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들은 “죽은 행실”(히 6:1; 9:14)이라는 히브리서의 한 표현을 인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0절을 그런 개념으로 읽을 수는 없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는 것과 사람이 자기 일을 쉬는 것이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죗된 행동”을 중지하셨다는 말도 참으로 듣기 민망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비유의 핵심적 사항은 하나님께서 제칠일에 자신의 창조 작업을 중지하셨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같은 날에 같은 방식으로 자기들의 일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