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제자들의 행위의 합법성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12장의 안식일 에피소드에서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사용한 것은 안식일 계명에 비추어 제자들의 행위가 합법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보다 더 높은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 성경절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합법성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205.1)
 제사장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것은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은 안식일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빙자하여 예배일까지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권위 있는 사람에게는 안식일의 법을 바꿀 수 있는 권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다윗과 제사장들의 예를 들었던 것인가. 인간의 권위라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능가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로 간주될 수 있다는 말인가? (205.2)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율법 사이에는 끝없는 대립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에는 그러한 갈등이 전혀 없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다윗 같은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고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예외적인 행동들은 얼마든지 법에 의하여 충분히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6.1)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씩이나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3,5)고 반문하신 것으로도 밝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의 합법성을 옹호하기 위한 선례를 율법 밖에서가 아니라 율법 안에서 찾고 계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나 그들 자신들의 권위가 율법을 능가했기 때문에 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안식일 율법 자체의 의도 안에 적법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죄가 없었던 것이다. (206.2)
 그리스도, 율법의 해석자
 모든 율법은 마땅히 바르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사장들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의 하나이다. 율법은 제사장들에게 안식일에도 일하라고 명령했다(민 28:9; 레 24:8).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른 법 곧 일하지 말고 쉬라는 안식일의 법(출 20:8-10)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율법의 문자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지 말고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과 같은 민주적인 법치국가에서는 대법원이 그 나라의 모든 법률들의 의도에 대해 최종적인 해석을 내린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마 12:28; 막 2:28)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주장하려 하신 것도 바로 이 권위였다. 즉 예수님이 주장하신 권위는 안식일 계명을 폐기하거나 대체시키는 권위가 아니라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는 권위였다. 유권해석자로서의 권위였다. (206.3)
 그리스도는 자기의 제자들의 무죄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섯 개의 중요한 논증을 제시함으로써 넷째 계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유권해석자의 권위를 과시하셨다. 첫째, 주님께서는 율법이 예외적인 상황으로 인정하는 일반원칙을 유효화하기 위하여 다윗의 예를 인용하셨다(마 12:3; 막 2:25). 둘째, 주님께서는 넷째 계명이 사람들의 영적 필요성에 대한 봉사를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필요성을 깊이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예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사례를 제시하셨다(마 12:5). 셋째, 그리스도는 성전과 제사 제도의 원형(마 12:6)인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도 제사장들처럼 어려움에 처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누리는 안식일의 예외적인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207.1)
 넷째, 예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시고(마 12:7) 안식일 계명의 준수에 있어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일이 첫째이고 예식적인 규칙들을 이행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설명하셨다. 다섯째, 예수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유권해석자로서의 특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의 제정된 목적은 인간의 안녕을 지켜주기 위한 것(막 2:28)이라는 근본 원칙을 재천명함으로써 안식일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적 신분을 강화하시었다. (207.2)
 한쪽 손 마른 사람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포에 뒤이어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시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마 12:9-21; cf. 막 3:1-6). 이 치료의 기능은 안식일에 그리스도가 메시야의 치료와 회복을 사람들에게 제공하심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다시 들어가보니” 거기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막 3:1). 이 사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미끼로 회당에 데려다 놓은 사람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엿보았다”(막 3:2)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군중 가운데 얼굴을 숨기고 예수님이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마태는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 하여 묻기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까”(마 12:10) 하였다는 것이다. 덫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함정으로 빠뜨리기 위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시험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저희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마음이 완악함을 근심하셨다(막 3:5). 그리고 그들의 도전을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대응하셨다. (208.1)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전문가들로 자처하고 있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셨다(막 3:4).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비유를 빌어 또 하나의 질문을 추가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 12). (208.2)
 예수님은 이 원칙적인 질문으로 안식일 계명 자체를 폐기시키려 하셨는가 아니면 안식일 제도를 그 본래의 가치와 기능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셨는가? 만약 전자라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안식일의 정신과 기능이 생명을 구하는 것과 대립한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 생명의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과연 안식일의 정신과 목적이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상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인식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과 목적을 크게 곡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에 안식일의 목적에 대한 곡해와 오용이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바로 이같은 곡해와 오용을 시정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208.3)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나타내고 특별히 힘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날이다. 동료 이웃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안식일의 이러한 정신이 크게 무시되었으며 그 대신에 안식일의 종교적인 의식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209.1)
 지금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안식일 치료의 에피소드에 있어서도 안식일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해 집단이 등장하고 있다. 한 쪽에는 그리스도가 서 계시다. 그는 그를 고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근심하시면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생명을 도우려고 나서고 있다(막 3:4,5).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심지어 예배를 드리는 시간과 공간에서조차 예수님을 송사하여 죽일 구실을 찾고 있는 율법 전문가들이 서 있다(막 3:2,6). 이처럼 서로 대립되는 두 태도의 대조야말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질문의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 안식일에 다른 사람의 육체와 영적 구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파괴적인 노력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209.2)
 그리스도의 안식일 개혁 프로그램은 율법에 대한 그분의 전체적인 태도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사명은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그 본래의 취지로 복원시키는 것이라고 하셨다(마 5:17,21ff). 지나간 여러 세기에 걸처 마치 먼지와 퇴적물이 쌓이듯 높이 쌓인 전통에 덮혀 율법의 기본 취지가 가려지고 퇴색되었기 때문에 계명의 배후에 있는 기본 의도를 분명히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210.1)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가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막 7:9). 예컨데 다섯째 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로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막 7:10) 하였지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해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해드렸습니다”라는 뜻으로 “고르반”이라고 한 마디 하면 부모에게 잘해 드리지 않아도 그만이 되었다(막 7:11). (210.2)
 이처럼 사람들은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었으니 안식일 계명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무정하고 궤변적인 규칙들에 묶여 창조주와 구세주를 사랑하고 동료 이웃들을 사랑하는 시간이어야 할 안식일이 사람들의 사사로운 의를 내세우기 위한 제도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치료해 주심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기본 의도를 명백히 밝혀 주셨을 뿐만 아니라 수세기 동안 안식일의 기념을 통해 길러 온 메시야의 소망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 보이셨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을 위해 의도적으로 베푸신 치료행위는 주님의 안식과 안식일의 관계를 밝히는데 기여하고 있다. (210.3)
 요약하건데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이 쉼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메시야의 안식을 제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다. 마태가 전하고 있는 두 개의 안식일 에피소드는 안식일 안식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자비의 요구와 제사장들의 안식일 봉사에 대한 언급을 통해 드러난 안식일의 메시야적 구원이고 두 번째 의미는 안식일에 양을 구조하고 병든 사람에게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실례를 통해 드러난 안식일의 메시야적 회복이다. 이와같은 안식일의 구속적/메시야적 이해에 비추어 마태의 신앙공동체와 사도교회 전체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고 있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는 이 글의 끝 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211.1)
 3.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안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