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와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안식일에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매일의 일인 것처럼 여자를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준 예수님의 치료행위도 안식일에만 특별히 적합한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님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하셨다는 것이다. (199.1)
 그러나 이 주장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에서 “네 소나 나귀와 네 모든 육축”까지도 안식일의 은총에 포함시키라고 명령하고 있다(신 5:14). 안식일 같은 날에도 “소와 나귀는 쉬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소와 나귀까지라도 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의 특별성 때문에 소와 나귀도 하나님의 은총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보다는 엿새” 동안에 치료해야 한다는 회당장의 주장에 대해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눅 13:16)고 반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치료하셨다기 보다는 안식일이 치료에 가장 합당한 날이기 때문에 그 여자를 그 날에 치료하셨음을 암시한다. 안식일은 “아브라함의 이 딸을 이 메임에서 풀어주기에 합당한 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99.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여자에게 제공한 육체적, 영적 자유는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안식일 해방(눅 4:18-21)의 한 본보기였다. 안식일의 구속적인 의미는 뒤에 나타나는 다른 사례들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안식일의 준수와 관련해서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안식일에 치료를 받은 그 여자와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를 목격한 사람들이 이 안식일 사건에 대하여 나타낸 반응들이다. (199.3)
 누가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영광스러운 일로 기뻐하였다”(눅 13:17). 그리고 “여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눅 13:13). 안식일에 사람을 육체와 영적인 매임에서 자유케 하는 일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일이요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는 일이다. 모든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영광과 이 기쁨이 재현되는 날이다. 안식일은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여 사단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 참 생명을 누리게 하신 새로운 출애굽의 기념일이 되었다. (200.1)
 2.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안식일의 관계
 구세주의 안식과 안식일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중반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안식일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 12:1-14절에서 두 개의 안식일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이 에피소드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30)는 예수님의 안식의 초청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적 주장에 대한 불신과 저항과 오해 속에서 안식일로 상징화된 평강과 안식을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야적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시대는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로 상징된 영원한 안식이었기 때문이다. (200.2)
 그런데 마태는 주님의 안식과 안식일의 상호 연관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안식으로 초청(마 11:28-30)하신 직후에 곧바로 두 개의 안식일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의 안식으로 초청하신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은 마태복음 12장에 소개되는 안식일 에피소드의 서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주님의 안식으로의 초청과 안식일 에피소드는 이처럼 구조상으로만 서로 연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에”(12:1)라고 표시함으로써 시간상으로도 하나로 묶여 있다. (201.1)
 마태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들을 자신의 쉼으로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님의 안식과 안식일이 시간적으로만 연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안식일 에피소드에 의해 잘 설명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첫 번째의 안식일 에피소드는 예수님의 쉼을 구속적인 쉼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에 힘들게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죄가 안 되는”(마 12:5) 사례를 가지고 호소하였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육체적인 안식이 아니었으며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끼치는 안식도 육체적인 안식이 아니었다. 영적이고 구속적인 안식이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의 치료를 소개하고 있는 두 번째 에피소드도 예수님의 안식일을 회복의 안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의 양을 안식일에 구조하는 사례를 들어 예수님의 안식을 설명하였다(마 12:11,12). (201.2)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더 많은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에게 “죄가 안 되는가”(민 28:8,9).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바쁜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 같은 “일하지 않는” 다른 날을 따로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같은 조치가 전혀 모색되지 않았다. 구약시대 전체를 통해서 그같은 조치가 전혀 강구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안식일 계명에 기초하여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려는 많은 그리스도들의 이른바 “칠 일 중 하루 원칙”(one-day in-seven principle)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201.3)
 만약 구약성경의 원칙이 “예배와 안식을 위한 제칠일”이 아니라 “예배와 안식을 위한 칠 일 중 하루”라고 한다면 구약성경은 안식일에 바쁘게 수고하는 제사장들을 위해 다른 하루를 별도의 안식일로 제정했을 것이다. 구약성경이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구약 성경의 제칠일 주장을 확증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의 안식일에 대신하는 신약의 안식일로 일요일을 설정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제7일 안식일 주장과 정반대 되는 칠 일 중 하루라는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202.1)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안식일 계명이 금하는 수고를 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죄로 정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라는 안식일의 목적을 성취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모두 안식일에 하나님이 명한 제사의 율법을 이행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제사장들의 봉사를 근거로 하여 자신과 제자들의 노역을 안식일의 합법적인 행위로 옹호할 수 있었는가. (202.2)
 예수님은 이 질문을 위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고 말씀하셨다. 성전과 그 봉사의 상징적 기능은 이제 진정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에 의하여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그리고 오히려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사 드리는” 행위 곧 궁핍한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봉사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새 제사장들로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복음 7장 22, 23절에서도 그리스도는 같은 개념을 피력하셨다. 안식일에는 제사장이 할례 행위를 통하여 갓 태어난 아기에게까지 언약의 축복을 끼쳐야 하듯이 그리스도도 전체적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02.3)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에 의해 모형적으로 수행되고 있던 구속적인 일 안에서 자신의 안식일 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 단단한 기초를 발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안식일 봉사를 “성전보다 더 큰 무엇”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 12:6). (203.1)
 제사장들의 성전 봉사와 제사를 통해 모형적으로 제공되고 있던 구원은 이제 사람의 아들인 메시야의 구원 활동을 통해 실재적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안식일 봉사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 죄가 없었던 것과 똑같이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섬기고 있던 제자들에게도 죄가 없었다. (203.2)
 성전과 그 봉사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안식일 신학을 설명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확실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전 봉사의 구속적인 기능은 예수님의 메시야적인 사명과 하나님이 안식일에서 의도하시는 목적을 가장 훌륭하게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속적 사명을 안식일과 동일시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친교야말로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사실을 밝히시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봉사를 통하여 안식일은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봉사함으로써 구원의 축복도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203.3)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시대에는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측면이 상당히 무시되고 있었다. 안식일의 예식적인 요구가 인간의 필요에 대한 봉사의 요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대한 이같은 왜곡을 통박하셨다.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치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다(마 12:7).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 그의 제자들은 비록 완전히 쉬라고 하는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였다 할지라도 안식일 계명의 진정한 의미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에 “죄가 없었다.” (203.4)
 그러면 “자비”는 무엇이고 “제사”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 말씀을 호세아서에서 인용하셨는데 호세아 선지자는 그의 백성을 향하여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간다”(호 5:6)고 꾸짖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값비싸고 많은 희생 제물로 달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삼상 15:22). 그들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호 6:6)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자비는 신구약 성경에서 모두 이웃을 도와주는 동정적인 태도로 특징화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특별히 “자비”가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에 나타내어야 할 도움과 구제의 행위를 뜻하고 있다(마 5:7; 9:13; 12:7; 23:23). 바리새인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안식일 오후에 배고픈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의 마음에는 동정하는 마음이나 도와야겠다는 의욕이 촉발되지 않았다. (204.1)
 그리스도에게는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한 행동이야말로 안식일의 진정한 준수였다. 안식일이 기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굽의 멍에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구속행위(신 5:15)와 죄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구속행위(눅 4:18,19; 13:16; 요 5:17)를 기념하는 안식일은 동시에 신자들이 이웃들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세우신 참된 안식일 봉사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산 봉사이며 종교적인 규정의 실행은 그 다음의 요구이다. 복음서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하신 이야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려움에 처한 죄인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푸신 이야기를 더 많이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을 엄숙하게 한다. (204.2)
 예수님이 내세운 것은 자신의 권위인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