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2 부 예수님과 안식일 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이 모두 안식일 신앙 때문에 안식일에 습관적으로 회당에 출입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사람들이 회당에 모이는 안식일을 습관적으로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즉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하는 습관은 오래된 습관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누가복음 4장 16절의 문맥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수용하기 어렵다. (193.3)
 첫째 “예수님은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처음으로 자신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앞서 안식일을 지켰다는 “규례”는 도대체 무엇인가. 두말할 여지 없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기 이전인 어린 시절부터 안식일을 지켜온 “규례”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한 것은 순전히 “가르치기 위한” 것일 뿐 안식일 신앙과는 관계 없는 행위였다는 주장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대부터 기독교회는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셨듯이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는 것으로 예배의 중심을 삼아왔던 것이다. 셋째로 안식일이란 낱말이 누가복음에서만 21회, 사도행전에서만 8회에 걸쳐 나타난다. 이것은 다른 세 복음서의 어느 것에 비교해 보아도 약 2배에 달하는 회수이다. 이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의 어느 기자보다도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4.1)
 넷째로 누가는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가 안식일에 안식일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가 다 마쳤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눕힌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시작되었다)”(눅 23:54)고 하였다. 누가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안식일을 명심하여 지켰다는 사실을 내비치려 하였던 것이다. 다섯 번째로 누가는 그리스도가 무덤에 묻힌 사실을 부연하면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 . .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쉰”(눅 23:55,56) 사실을 함께 강조하였다. 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까지 안식일의 습관적인 준수자들로 소개하였을까? 그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안식일 준수의 모본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4.2)
 안식일 해방의 메시야적 실현
 예수님이 보여주신 안식일 신앙의 모본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를 포함한 복음서 기자들이 안식일과 그리스도의 오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95.1)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공적 봉사의 출발을 선포하실 때에 주로 이사야 61장 1,2절에 있는 성경절을 읽으시고 해설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5.2)
 여러 학자들이 강조했듯이 이 성경절은 “메시야 프로그램”의 요약 같은 구절이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 61장 1,2절은 본래 여호와의 종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포로의 신세로부터 해방을 맞게 될 예언을 안식년의 표현을 빌려 묘사하고 있었다. 유대교에서는 주류나 분파의 구별이 없이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야의 활동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사야 61장 1-3절58장 6절에 나타난 안식년의 용어와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도 이 성경절을 같은 의도로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유대 민족이 수세기에 걸쳐 안식년의 비전 속에 간직하고 키워온 메시야의 기대가 바야흐로 자신에 의하여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주장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가 안식년의 표현을 빌어 약속한 메시야의 구원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에서 풀려나 메시야 안에서 새로운 유업을 발견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희년 안식일의 약속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던 것이다. (195.3)
 약속과 성취의 주제는 모든 복음서들에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가 거듭거듭 구약성경 예언의 성취로 제시되고 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과 봉사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 24:44; cf. 24:26, 27)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96.1)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약속이 모두 실현되었으므로 안식일 계명의 의무는 끝났다는 말씀이었는가? 그리고 안식일의 기능이 다 끝났으므로 안식일을 대신해서 일요일 같은 새로운 예배일이 제정되어도 좋다는 의도이셨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적 봉사를 통하여 안식일의 쉼과 해방의 약속을 실현하셨으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하는 더욱 의미심장하고 능력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복음서에 소개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와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6.2)
 초기 안식일 치료
 누가는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공생애의 출발을 선포한 사건에 곧이어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 두 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다가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 주신 사건이고(눅 4:31-37; 막 1:21-28), 두 번째는 예수님이 같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끝내고 시몬 집에 들어가서 “시몬의 장모를 열병으로부터 치료해 주신 사건이다”(눅 4:38,39; 막 1:29-31).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눅 4:39; 막 1:31)고 한 것을 보면 여기에서도 안식일의 기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해방, 기쁨, 봉사”의 개념이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나타나고 있다. (196.3)
 꼬부라진 여인의 치료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고 있는 바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러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여자”(눅 13:11)의 치료는 안식일과 구세주의 구원 봉사의 관계를 한층 더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눅 13:10-17).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놓이게 하다, 풀다, 자유케 하다”라는 뜻의 희랍어 동사 “루에인”을 세 차례나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1)
 한번은 예수님이 여인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눅 13:12)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셨고, 두 번은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 행위에 대한 회당장의 분노어린 항의에 대답하실 때 사용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16). (197.2)
 예수님은 이 논쟁을 통하여 얼마나 안식일의 정신이 왜곡되었는지를 역설적으로 폭로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게 하기 위하여 풀어주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용인하면서도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여자를 안식일에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은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기본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안식일의 왜곡된 통념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대항하였던 것이다. (197.3)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으셨다. 오직 그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수많은 세월 동안 누적되어온 수 없는 전통과 규칙들에 의하여 덮히고 가려진 안식일의 본래적인 가치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198.1)
 안식일 구원
 “사단에게 매인바 된”(눅 13:16) 희생자들을 안식일에 풀어주자는 주장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눅 4:18) 사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포를 생각케 한다.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딸을 그녀의 육체와 영적 매임에서 자유케 하는 예수님의 행위는 안식일로 상징화된 메시야적 자유가 잘 예증된 것(눅 4:21)이라 할 수 있다. (198.2)
 여러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바와 같이 우리들은 예수님의 안식일 치료에서 단순히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과 자비의 행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안식일의 행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치료를 할 수 없는 날이 아니라 치료행위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198.3)
 그런데 안식일로 상징화되고 약속된 메시야의 구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해서 안식일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식일 봉사로 축복을 받았으므로 안식일은 모든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이 치료를 받은 축복의 기념일이 되었다. 사단의 멍에를 벗어나 구세주의 자유 안으로 들어온 경험의 기념일이 된 것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하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