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0장—서양 중세 교회의 안식일과 주의날
 셍쿠스 모르(Senchus Mor)라는 고대 법전에서도 “모든 제칠일을 주님의 예배를 위해 봉헌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있다.28 콜룸바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진정한 저자가 누군지 확인되지 않는 한 서한에는 영적인 안식일 준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여섯 날 동안에는 일을 하고 안식일인 제칠일에는 모든 노예적인 일들을 삼가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숫자 6은 우리들의 일의 완성을 뜻한다. 하나님이 6일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칠일에는 노예적인 일들 즉 죄짓는 일이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현세에서 우리들의 일들을 완전히 마치고 우리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참다운 안식에 도달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29 (190.3)
 초기 켈트 교회가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으로 주일을 지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뮬쿠(Muirchu)가 쓴「성 파트릭의 일생」(Life of Patrick)을 보면 성 파트릭은 주일에 안식하다가 근처에서 이교도 노동자들이 토목 공사를 하느라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주일에는 일하지 말도록 금했다. 또 파트릭은 주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바같 출입을 하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30 그러나 아돔난의「콜룸바의 일생」을 보면 콜룸바는 일요일에 부두로나가 이오니아로 가는 여행자들을 배에 태워 해협을 건너가도록 도와주고 있다.31 콜룸바의 전기에는 일요일 규칙을 이긴 사람들에 대한 위협적인 주장들을 찾아볼 수 없다. (191.1)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 방식에 있어서 구약 성경과 유대교의 문제
 중세 기독교가 어찌하여 안식일을 존중하고 또 일요일까지도 안식일처럼 지키고자 했는 지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구약 성경과 유대교에 대한 중세 교회 일반의 높은 관심을 먼저 이해해야한다. 이러한 경향은 매우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특히 시리아 교회에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전통이 일찍부터 깊었다.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386년과 387년에 안디옥에서 유대 회당의 미혹을 경계하는 여덟 개의 설교를 남겼다. 그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떠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에 단순한 참관인으로가 아니라 열성적인 예배자로 참석하고 있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이 설교들을 남겼던 것 같다.32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회당 예배가 훨씬더 엄숙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원해서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33 (191.2)
 이러한 경향은 일부 서방교회에서도 발생하였다. 특히 서고트족의 지배 지역에 많았다. 그리하여 서 고트족 통치자들은 유대교의 종교의식에 참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으로 처벌하는 법률까지 제정하였다.34 그러나 794년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스페인의 감독들에게 보내는 공한에서 신앙과 그 밖의 일로 유대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35을 볼 때 서고트족 통치자들의 법률적 조치는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동일한 현상이 다른 지역에서도 보고되었다. 8세기 중엽의 어떤 익명의 저자도 신명기의 주석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복음과 유대 율법을 동시에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36 풀다(Fulda)의 대 수도원장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76-856)는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유대인 동조자들에 대해” 언급하였다.37 “유대교 동조자”(Judaizer)와 “유대교 동조 활동”(Judaizing)이란 말은 정통 신앙으로부터의 경미한 이탈 현상을 가리켜 사용한 말 같다. 그러나 당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확고한 결심 위에 유대인들의 신앙 방식을 수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구약 성경만을 읽거나 유대인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인들의 음식물 규칙들을 수용하는 형태로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38 (191.3)
 796이나 797년에 개최되었던 북 이탈리아의 프리울(Frioul) 공회의의 교회법 제13조에 따르면 북 이탈리아에 안식일을 지키는 농부들이 있었던39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새로 개종한 불가리아인들이 교황 니콜라스1세에게 안식일에 일을 해야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문의하는 서한을 보낸 것을 보면 안식일의 노동 문제가 10세기의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40 9세기말의 한 공회의는 백성들에게 안식일보다는 일요일을 지키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유대교 방식으로 일요일을 지키지 않도록 엄격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41 중세기의 공회의들이 라오디게아 교회법의 안식일 규제 조항들을 자주 되풀이하여 주지시키고 있는 것은 안식일 준수와 안식일 방식의 일요일 준수가 여전히 시들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42 (192.1)
 서방 교회의 반(反) 안식일 태도는 1054년의 동서 교회 대분열(Great Schism)의 중요한 요인이었다.43 동방교회는 서방 교회의 토요일 금식 관습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서방 교회의 그러한 조치는 여러 공회의가 반복하여 반포한 교회법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교황의 주장으로 그 문제에 대한 설명이 충분했다고 생각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같은 결정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들이 즉각적으로 굴복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192.2)
 로마 중심의 서방 가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들에 대하여 그들이 유대교 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세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한다고 비난하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과 그들의 안식일을 배설물로 여겨야하는데도 불구하고 “동방 교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44 동서 교회가 분열된 후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인 미하일 케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는 안디옥의 대주교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교회 분열의 비극적인 현상을 설명하면서 동방 교회의 전통을 강조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안식일을 주일과 똑같이 존중하고 그 날을 지키고 그날에 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45 (192.3)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주일을 지키려는 중세 교회의 열망은 교회 자체가 교회의 예배의식과 교회법의 규정에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하게 되면서 더욱 고취되기도 했다.46 또 구약 성경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특히 카로링가 왕조의 프랑크 제국에서는 궁정 예식의 모델로 구약 성경의 제도들이 많이 이용되었다. 교황들은 카로링가 왕조의 프랑크 황제들을 “새로운 다윗 왕”으로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47 이처럼 교회와 국가가 모두 구약 성경의 사용을 부채질했다. (192.4)
 게르만 부족들이 일요일 준수의 토대로 십계명을 사용함
 게르만 부족의 정복과 서로마제국의 붕괴로 인한 학문의 쇠퇴가 또한 모세의 율법에 대한 교회의 의존을 높이는데에 일조하였다. 게르만 정복자들은 서방 세계 안에 자신들의 사법 체제를 확고히 세우고자 했을 때 자신들의 법제 속에 로마법 보다는 성서적 이상을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모세법 중심의 서양 사법 체제는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다시 로마법이 부흥되기까지 계속되었다. (192.5)
 이처럼 당시에 구약 성경의 방식이 사회와 교회에서 크게 호응을 얻고 있었으므로 교회가 새로 개종한 게르만 부족들에게 일요일의 준수를 가르치고자 했을 때 십계명을 이용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특정한 날을 예배일로 지키도록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6세기의 아를스(Arles)같은 기독교 중심지에서조차 미사를 마치기도 전에 교회당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직도 주피터 신을 위해서는 목요일에 일을 쉬면서도 주일에는 어떤 일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48 6세기 말엽 스페인에서 브라가의 마르틴(Martin of Braga)은 주피터의 날에 열성을 나타내는 이교도들과 주일의 신성성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49 이렇듯이 일요일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게르만 부족들에게 일요일의 준수를 가르치고자 했을 때 구약 성경의 안식일 계명처럼 힘있고 설득력 있는 명령을 다른데서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1)
 교회는 게르만 부족들에게 일요일의 준수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교회법을 제정하기도 했고 국가의 강제력까지 동원했으며 심지어는 미신까지 사용하였다 그 결과 중세 초기의 교회가 주장했던 일요일 준수 방식 곧 죄로부터 안식하는 방식의 일요일 준수는 덜 강조되고 신체적인 활동을 표면적으로 중지하는 방식의 일요일 준수가 더 강조되게 되었다. 중세기에 일어난 일요일 준수 신앙의 중요한 특징은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이 시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일요일이 넷째 계명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준수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3.2)
 일요일 준수와 십계명의 연결은 585년에 개최되었던 마콘의 제2차 공회의(Second Council of Macon)에서 분명히 이루어졌다. 이 회의는 구약 성경에 기초하여 주일에 일을 완전히 중지 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회의의 교회 법에서 일요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들의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신 날로 높여졌으며 율법과 선지자들이 제칠일 안식일에 의하여 예시한 영원한 안식의 날로 찬양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가장 가까운 교회에서 기도와 눈물로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50 (193.3)
 몇 년 후인 589년의 나르본 공회의(Council of Narbonne)는 “어린이, 노예, 고드인, 로마인, 시리아인, 희랍인, 유대인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은 주일에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황소를 붙들어 매기 위해 급히 집을 나서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 누구든지 일요일에 일을 하다가 발각되면 벌을 받아야 했다. 자유롭게 태어난 자는 6실리디의 벌금을, 노예는 100대의 매질로 벌을 받았다.51 (193.4)
 안식일의 준수 방식으로 주일을 준수시키기 위하여 세속정부의 지원도 신속하게 이루어 졌다. 585년 11월 10일에 국왕 군드람(Gunthram)의 칙령으로 소집된 마콘 공회의 (Council of Macon)의 교회법은 성직자들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한 사법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엄명하였다.52 나로본 공회의의 일요일 준수 규정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킬데베르트 2세(Childebert II) 국왕은 일요일에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가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하였다.53 (193.5)
 일요일의 휴업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법과 세속법의 제정 못지 않게 크게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요소는 일용일 법을 어길 때 뒤따르게 되는 초자연적인 처벌을 내용으로 하는 게르만 부족들의 민담의 발전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Tours, 540-594)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의 기록 중에는 리무진(Limousin)에 사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일요일에 들에서 일을 하다가 모두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54 (194.1)
 일요일 준수를 위한 강제 규정들과 급진적인 안식일 신앙사상
 뒤이어지는 세기들에서도 일요일 준수를 위한 강제 조치들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일요일을 위한 금지 규정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져갔고 갈수록 세밀해져갔다. 그리고 개인적인 비밀 고해가 일반화되면서 일요일 준수도 죄와 참회의 항목들이 즐비한 고해 규정서의 차원에서 강조되고 장려되었다.55 (194.2)
 이제 일요일은 그 범법이 하나님에 의해 처벌받는 신적인 제도가 되었다. 일요일의 안식을 누려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는 국법으로 보장되었고 이 권리를 무시하는 죄는 무서운 형벌로 처벌되었다. 심지어 노예들이 동원되는 작업이라 할지라도 일요일에는 반드시 중지되었다. 장원의 영주들도 일요일에 노예들을 농장에서 일을 시킬 수 없었으며 짐을 나르기 위해 짐승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56 어떤 지역에서는 고집스럽게 일요일 법을 어기는 자유민의 자유권을 박탈하고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57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