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의 모든 배경이 유월절이기에 우리는 출애굽에 암시된 성만찬과 십자가의 반향을 계속해서 기대하게 된다. 사실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 기록된 설교가 예수께서 유대인 회당에서 유월절 의식에 관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Brown, 1:277-280). 또한 본문 속에서 예수께서는 1-15절의 먹이는 이적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요한복음 4장에서 육신의 물에서 영적인 물로 옮겨간 것처럼 육신의 떡에서 영적인 떡으로 옮겨가고 있다. (176.4)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위의 배 위에서 제자들과 합류하여 호수 반대편으로 건너가셨다(16-21절). 반대편 해변의 청중들은 예수를 찾아 디베랴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자들의 도움을 받아 호수를 건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그를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이 장의 모든 설교와 대화가 이루어졌다(22-25, 59절). (176.5)
 문단의 배경
 요한복음 6:22-59에 대한 강력한 배경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녀에게 만나를 먹이신 출애굽 전승이다(출 16; 민 11). 만나가 최초로 내린 것은 제2월 15일이었다(출 16:1). 유월절은 실제로 제1월 15일에 있었고, 둘째 달은 “보충적인”(“backup”) 유월절의 역할을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정상적인 시기에 유월절을 경축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를 대신하여 둘째 달 제15일에 이를 경축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최초의 만나의 내림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유월절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만나가 그쳤다(수 5:10-12). 그러므로 유대주의 안에서 메시야가 유월절에 이르러 올 것이고 그의 도착과 더불어 만나가 다시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승이 생겨나게 되었다(Midrash Qoheleth 1:9). 그래서 예수께서 유월절 바로 전에 5,000명을 먹이셨을 때, 청중은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그가 더 큰 이적, 즉 만나를 회복시키므로 모든 사람을 항시 먹일 수 있게 할 것인지 아닌지 추론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유월절이 가까웠으므로(요 6:14), 그들은 만나가 내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행하라고 도전하였던 것이다(30, 31, 34절). (177.1)
 문단의 세부 사항
 전날 기적적으로 먹게 된 청중들이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를 발견했다(22-25, 59절).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은 영적 음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물질적인 수준에서 예수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26절). 그들은 이적의 의미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더 많은 이적을 보기를 원할 뿐이었다(2절). 예수께서는 영적인 것, 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그들의 시선이 향하게 되기를 원하셨다(27절). 청중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실행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 질문한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의 개념을 어렴풋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28절). 그들은 물질적인 수준을 약간 넘어섰지만, 아직까지 예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77.2)
 예수께서는 이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셨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 즉 궁극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일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29절; 14:6).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받으실 만한 순종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가 믿는 그분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성장은 예수의 자신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 기초하고 있다. (178.1)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들은 그를 믿을 수 있는 큰 표징을 요청하였다(30절). 그가 이미 5,000명(남자와 여자와 아이를 합한 수—10절)을 먹이는 놀랄 만한 이적을 베푸셨는데도 그들이 또 이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음식 이적을 단순히 맛보기로 여겼다. 그들은 확증을 원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징, 즉 우주적인 표징을 원하였다. 그들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먹도록 준 하늘로서 온, 천사들이 먹는 음식인 만나에 대해 말씀하는 성경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다(31절; 또한 시 78:24, 25를 보라).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그가 올 때마다, 유월절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회복시켜 줄 것이었다(6:14; 신 18:15, 18). (178.2)
 예수께서는 모세가 준 만나는 그들이 찾고 있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 떡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온 참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생명을 주신 분(a person)이었다(6:32, 33).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우주적 표징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대신에 예수께서는 “내가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우주적 표징은 바로 나이다”라고 대답하셨다(33절을 보라. 참고 눅 17:20, 21). 그들이 그를 믿으면, 그들이 필요한 모든 증거들을 받게 될 것이다. (178.3)
 34절은 백성들이,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것처럼(4:11, 15)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제안은 그럴 듯하게 들리기 시작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반복하여 하늘로서 온 참 떡은 오직 자신뿐임을 명백히 하셨다. 사실 35절을 시작하면서 모든 예수의 진술은 일인칭으로 되어 있다. 이는 개인적으로 그와 맺는 관계가 그 강론의 궁극적인 쟁점이라는 그의 주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의 떡 진술의 연관성을 살펴보라. (179.1)
33절—하늘에서 내려온 분이 세상에게 생명을 준다
35절—내가 생명의 떡이다
41절—내가 생명의 떡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48절—내가 생명의 떡이다
51절—내가 생명의 떡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58절—내려온 떡이 세상에게 생명을 준다
(179.2)
 생명의 떡과 설교의 분명한 의미는 예수를 보고 그를 믿는 것은 현재는 영적인 의미로, 그리고 궁극적인 의미로는 “마지막 날”에 참된 생명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40절; 5:21).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매일의 경험 속에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에서 “믿는 것”(1:12; 6:47)은 언제나 계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단지 한 분만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계속적인 매일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179.3)
 요한복음 6:37은 사랑받는 절이다. 이 절의 두 부분을 매력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들은 단체로 보이는데, 이는 헬라어의 중성의 사용을 통해 매우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개인이 아닌 단체가 구원받도록 예정해 놓으셨다. 헬라어에서 이 동사의 둘째 부분은 남성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는 그들이 그에게 기꺼이 나오려고만 한다면 그 단체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받아들일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 문단의 앞부분(44절을 보라)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에, 둘째 부분은 인간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두 진리가 균형을 이루며 긴장 관계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명확한 하나님의 뜻과 분리된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은 이르러 오지 않으며, 자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39, 40절을 보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떡”은 그의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생명의 떡에 관한 강론의 첫 부분과 끝 부분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35-50절에서는 계시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사람들이 인류에게 생사의 문제인 예수는 누구이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하늘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45-47). 그러나 51-59절에서는 강조점이 주님의 만찬과 십자가에 대한 암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54-56). 이 같은 “식인종적인” 언어는 현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먹은 음식이 몸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그가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생동감 있는 표현 방식이다. “음식이 육신에 결합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개인적으로는 구별되나 영적으로는 한 생명이 된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41). 주님의 만찬은 이와 같이 육신을 예증으로 삼은 영적 은유(metaphor)이다(화잇, 시대의 소망, 389를 보라). (180.1)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일 때 일어났던 것처럼(49, 50, 58절; 이를 출 16:2, 7, 8; 고전 10:10과 비교하라), 생명의 떡의 강론에 대한 유대인의 처음 반응은 수군거림(6:41-43; 또한 61, 66절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들의 반응을 보라)과 자기들 사이에 심한 다툼이었다(52절). 예수를 보고 그의 이적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36절). 본 사람들의 의무는 믿는 것이다(47절; 20:29). (181.1)
 문단의 주요 주제
 하늘에서 온 참 떡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의 개념은 예수의 위대함과 자기 희생적인 겸손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상징이다. 자신을 영생의 근원이라 하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셨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신자들이 먹게 내 놓아, 신자들이 마음껏 활용케 하여, 진정한 모든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도록 했다(Gruenler, 47). (181.2)
 예수께서는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으로 대체시키셨다. 만나의 경우, 사람들은 떡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다. 예수께서는 영생으로 이끄는 떡을 제공하셨다(6:58). 요한복음에 많은 상징들은 매일의 경험에서 끌어낸 것으로 떡, 물, 그리고 생명과 같은 상징들이다. 이 모든 상징들은 영생의 실체를 언급하고 있는데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그와 비교할 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극한에 이르도록 극도의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려 본 적이 있는가? 그때 찬 음료와 좋아하는 소스를 발라놓은 빵 한 조각을 받는 심정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해 영적 의미를 끌어내셔서 그가 제공하게 될 생명에 관한 교훈을 주시고자 하였다. 생명의 떡의 설교는 예수께서 가져오시는 영적 생명에 대한 그대의 필요가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만큼이나 절박하다는 것이다. 몸이 음식과 음료와 태양 빛을 갈망하듯이 영혼은 예수의 임재를 갈망하는데, 예수의 임재가 허용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내부에 오직 예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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