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37은 사랑받는 절이다. 이 절의 두 부분을 매력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들은 단체로 보이는데, 이는 헬라어의 중성의 사용을 통해 매우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개인이 아닌 단체가 구원받도록 예정해 놓으셨다. 헬라어에서 이 동사의 둘째 부분은 남성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는 그들이 그에게 기꺼이 나오려고만 한다면 그 단체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받아들일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 문단의 앞부분(
44절을 보라)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에, 둘째 부분은 인간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두 진리가 균형을 이루며 긴장 관계 속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명확한 하나님의 뜻과 분리된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은 이르러 오지 않으며, 자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39, 40절을 보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떡”은 그의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생명의 떡에 관한 강론의 첫 부분과 끝 부분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35-50절에서는 계시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사람들이 인류에게 생사의 문제인 예수는 누구이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하늘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45-47). 그러나
51-59절에서는 강조점이 주님의 만찬과 십자가에 대한 암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
54-56). 이 같은
“식인종적인” 언어는 현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먹은 음식이 몸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그가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생동감 있는 표현 방식이다.
“음식이 육신에 결합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개인적으로는 구별되나 영적으로는 한 생명이 된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41). 주님의 만찬은 이와 같이 육신을 예증으로 삼은 영적 은유(metaphor)이다(화잇,
시대의 소망, 389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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