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9장—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제칠일을 안식일로 준수하는 신앙이 12세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현저한 예의 하나가 에티오피아의 교회이다. 또 이 에티오피아아 교회와 여러 가지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교회가 이집트 교회이다. 이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의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집트교회의 안식일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66.1)
 이집트 교회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
 이집트에서 이루어진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의 역사는 근동 지역에서의 일요일과 안식일의 역사와 대단히 유사하다. A.D 306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페테르(Peter)는 그의 「참교회에 관한 교회법」(Cannons Poeniten-tiales)의 제 15조에서 주장하기를 “수요일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모의했으므로 금식해야하고 금요일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겪으셨으므로 금식해야 한다. 주일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기쁨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1 안식일의 금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페테르가 이와같이 지막한 교회법에서 안식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일요일만 언급한 것은 이미 이때 이집트에서는 일요일이 유일한 예배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예배일로 존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166.2)
 4세기의 가명의 아다나시우스(Psuedo Athanasius)의「씨뿌림에 관한 설교」(Homiliade SamenteX 보면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읽을 수 있다: “안식일에는 우리가 모두 함께 모인다. 그러나 유대교의 방식에 물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거짓된 안식일들을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식일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예배하러 모인다. 옛날에는 영예로운 안식일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었다. 우리만 안식일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도 말하기를 내가 안식일을 버리고 너희의 월삭과 안식일을 멸시하겠다”고 말하였다.2 이 자료에 의하면 안식일은 준수되었지만 유대교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방식으로 준수되었다. 이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먹었다고 하여 바리새인이 이를 정죄한 경우를 유대교의 가장 왜곡된 안식일 준수 방식의 예로 들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금지하지 않은 것을 안식일에 금지하였다는 것이다.3 (166.3)
 가명의 아다니시우스의 또다른 작품에서는 안식일과 일요일에 관련된 또다른 부분이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최초의 창조 후에 안식하셨다. 그 때문에 유대인들의 세대는 제칠일에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는 끝이 없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지금도 일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첫번째의 창조때 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도래할 안식일들의 안식일에 있다. 새 창조에는 끝이 없을 것이지만 안식일들의 안식일이 드러나서 영원한 축제를 기념할 것이다. 최초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제공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첫 창조의 끝과 새창조의 시작을 똑같이 잘 알게 하려했기 때문이다∙∙∙” (167.1)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첫 창조의 끝을 주지시키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첫 창조의 끝을 앎으로써 후속되는 두 번째 창조의 시작을 알고자 노력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첫째 창조의 끝은 안식일이고 새로운 창조의 시작은 일요일이다. 그날은 주님이 옛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을 시작한 날이다.”4 (167.2)
 이 주장에 의하면 제8일에 행하는 할례까지도 “제칠일 이후에 만물이 영적으로 재탄생 될 것을” 미리 예상하게하는 제도이다.5 주일은 창조의 시작이며 안식일의 끝이다. 그래서 사람을 갱생시킴으로써 할례는 끝난다. 사실 이 두가지 일 곧 창조의 시작과 인간의 갱생이 제8일에 이루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8일은 안식일을 폐한것이고 안식일이 제8일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6 이처럼 가명의 아다나시우스는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었으며 일요일에 의하여 안식일이 폐했다”고 말했다. (167.3)
 그러나 동시에 4세기의 이집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예배하러 안식일에 교회로 왔다”고 보고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인 티모데우스 1세(Timotheus 1. c. 381)는 말하기를 안식일과 일요일에는 성찬식이 거행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제사”에 동참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두 날에 부부의 관계를 자제해야 한다고 하였다.7 (167.4)
 팔라디우스(Palladius, C. 365-425)는 그의「라우수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에서 파코미우스(Pachomius)의 규칙을 따르는 이집트 수도사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안식일과 일요일에 성찬식에 참가한다고 전하였다.8 그는 같은 글에서 수녀원에서 이미 30년을 보낸 처녀인 타오르(Taor)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다른 처녀들은 매 일요일에 성만찬 예배를 위하여 교회로 갔지만 타오르는 수도원에 남아서 누더기를 입고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9 (167.5)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on, c.360-c.433)는 그의「코에놀리아의 규칙」(Institute of the Coenolia) 에서 역시 이집트의 승려들의 규칙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저녁이나 밤을 제외하고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외의 날들에는 공적 예배가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거룩한 성찬 예배를 위해 제3시에 함께 모였다”10고 하였다. 제3시는 현재의 오전 9시에 해당한다. (167.6)
 카시아누스는 자신의 암자에 혼자 살면서 혼자서는 결코 음식을 취하지 않는 한 늙은 수도승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비록 “5일 동안 내내 단 한명의 형제 수도사도 그의 암자를 찾아주지 않아도 그는 계속하여 음식물을 거부하다가 토요일과 일요일이 이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서 거기서 낯선 사람을 찾아 자신의 암자로 데리고 와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11 (168.1)
 카시아누스에 따르면 “이집트와 테바이드 지역 전체를 통틀어” 저녁과 밤 예배를 드릴때 구약 성경을 읽든지 신약 성경을 읽든지 하나를 선택하여 읽도록 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신 구약 모두에서 교훈의 성경절을 찾아 읽었다.”12 그는 426과 428년 사이에 「협의」(Conference)를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성찬 예식을 너무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일년에 한 번 이상으로 성만찬 예식에 참가하기를 두려워 하는 일부 보수적인 수도승들의 관행을 비판하였다.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하기 위하여 매 일요일 마다 성찬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좋은 일”이라고 주장하였다.13 이 문서에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을 미루어 볼때 당시에도 안식일이 어느정도 까지는 준수되고 있었으나 안식일에 비해 일요일이 더욱 더 중요시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168.2)
 카시아누스의 이후에 교회사가(敎會史家)인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 C. 440)가 이집트의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 관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세계의 전체 지역의 거의 모든 교회가 매 주간의 안식일에 신성한 성찬식을 기념하고 있으나 오직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고대의 일부 전통을 빙자하여 이렇게 하기를 중단하였다. 그래도 알렉산드리아의 이웃에 살고있는 이집트 사람들과 테바이스(Thebaf´s) 주민들은 안식일에 종교적인 모임을 갖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일반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성찬예식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음식을 먹고 만족한 다음에 저녁에는 제물을 바치고 성찬예식에 참가한다.”14 (168.3)
 소조멘(Sozomen. C. 400-C. 447)도 그의「교회사」에서 같은 내용을 남겼다. “콘스탄티노플과 거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주간의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함께 모였다. 그러나 이 관습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결코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에는 이같은 관행과는 달리 도처에서 정착된 사람들이 안식일 저녁에 함께 모여 그 앞서 저녁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찬식에 참가하는 도시들과 마을들이 많다.”15 (168.4)
 이 보다 몇 년 앞서서 카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는 안식일과 일요일의 제3시(오전 9:00)에 성찬식이 거행된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와 소조멘은 안식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성찬식을 거행한다고 전했다.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이러한 관행이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관례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아누스가 이집트에 머물고 있던 A.D 400년 이후에는 이집트 교회에서 안식일 성찬 예배가 저녁 성찬 예배로 격이 낮아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안식일 예배가 완전히 배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168.5)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구스와 소조멘의 설명 중에서 놀랍게 들리는 부분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종교적 목적으로 모이지 않는 예외적 지역으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그 이유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만이 “고대의 일부 전통”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마가 2세기부터 일요일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마 교회가 그러한 결정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의 하나는 유대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로마제국과 시민들에게 자신들을 차별화하려는 로마 교인들의 열망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대적 전통을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심지어 안식일을 금식의 날로 만드는 일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169.1)
 알렉산드리아 교회도 일찍이 일요일 준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동방교회와의 조화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안식일을 예배와 축제의 날로 계속 지켰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컷던 것도 끝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안식일의 준수를 완전히 포기하게 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하게 된다. (169.2)
 적어도「바르나바스 서신」(Epistle of Barnabas)이 나오게 되는 2세기 초부터 알렉산드리아에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역사를 논의 하면서 유대인들이 “항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말했다.16 그리고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영업을 하지않고 또 그들의 시간을 율법을 듣는 일로 사용하는 대신에 극장에서 오락을 즐기는 일로 사용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Cyril. 412-444)의 치세 기간에 기존의 긴장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고 말했다.17 유대인들은 교회를 불태우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였다. 키릴은 그의 독특한 호전성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였다. 전집정관 오레스테스(Orestes)의 시대로부터 이 도시에 거주해 왔던 유대인들이 이 도시로부터 추방되었으며 그들의 모든 소유가 박탈되었다.18 (169.3)
 대감독 키릴의 때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안식일 예배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연한 일치의 이상의 일이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와 소조멘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와 그에 인접하는 이집트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안식일의 예배가 계속되엇다. 그러나 위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그같은 안식일 예배도 안식일 오전 예배로부터 저녁 예배로 격하되고 있다. 안식일 예배를 계속하여 보존하려는 희망과 안식일을 적대하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눈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같은 신축적 태도로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169.4)
 5세기말부터 6세기 초에 걸치는 기간에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추측이 되는 여러개의 설교문 가운데 “주의 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설교문의 목적은 일요일의 예배가 끝난 후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어떤 개인이 유세비우스에게 질문한 사항들에 대해 답변한 것이었다. 그 질문은 “왜 우리는 주일에 일하지 않음으로써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 “우리가 주일에 일하지 않음으로써 받는 보상은 무엇인가?”였다. (1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