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9장—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
 「시노도스」(Sinodos)는 14세기 중에 번역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저작물이다. 「사도들의 교훈」과 함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에티오피아 국민들의 종교생활을 지도하고 있다.64 국왕 자라 야코브는 이 문서의 사본 하나를 1442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에티오피아 공동체에 보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도 함께 보냈다. “내가 여기에 이 책 시노도스를 보낸다. 첫번째 안식일과 일요일에 이 책에서 많은 위로를 얻기 바란다.”65 (178.1)
 「사도적 교회법」(Apostolc Canons)은 시노도스의 핵심 부분이다. 그 66조를 보면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서한으로 명하노니 너와 너의 노예와 너의 종들은 5일 동안 일하고 안식일과 일요일에는 쉬어야 한다”고 했다.66 그리고 이 교회법에는 주인과 종이 모두 안식일에 교회에 가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는 사상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설교가 포함되어 있다. 이 교회법에 사용된 성경 구절들 중에는 창세기 2:2, 출애굽기 31:13, 이사야 56:4-7등이 포함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안식일과 일요일의 두 날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진술된 사실이다.67 (178.2)
 이 때이거나 이 때 보다 더 이른 시기에 안식일과 일요일의 준수를 직접 다루고 있는 다른 본문들도 작성되었다. 그중에는 에티오피아어로 된 아다나시우스 아나포라(Athanasius Anaphora: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안식일 곧 일요일의 찬미)와, 안식일을 위한 기도와 안식일에 대한 설교가 있다.68 (178.3)
 자라 야코브의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글로 이 국왕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신앙의 회복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잘 요약하였다. “에티오피아 백성들은 안식일과 축제일들을 지키는 그들의 신앙과 방식에 대한 교훈을 등한시하였다. 나는 젊은 시절에 안식일이 무시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날에 일하는 모습들을 직접 목격하였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든 활동이 중지되며 사람들이 그들의 안식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안식일의 시작이다 라고 말하는 제9시(오후 3시)로 부터 안식일이 시작한다. 다른 축제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준수되었다. 국왕이 그 날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안식일도 일요일 처럼 아무 차별 없이 거룩하게 되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 이 모든 신조들과 관습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본성을 가진 다른 신조들과 관습들이 모두 모든 안식일과 축제일에 각 지방마다 모든 남녀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안식일과 일요일의 거룩한 준수를 가르치도록 명령하신 우리의 임금에 의해 해설되었다.”69 (178.4)
 로마와 폴투갈과의 첫 접촉. c. 1482-c. 1600:프란시스코 알 바레즈(Francisco Alvarez, c. 1540 사망)는 그의 「아비씨니아 주재 폴투갈 대사의 이야기」(Narrative of the Poithmese Embassy to Abyssinia)에서 안식일과 일요일 두 날의 준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1400년경의 안식일 논쟁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글귀에서 “토요일을 준수하지 말라고 명령한” 한 왕을 언급하였다. “이 군주는 압바 필립(Abba Phillip)과 그의 수사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바 필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토요일이 준수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는지를 보여 주려고 하였으며 왕 앞에서 그 일을 잘 해냈다”고 하였다. 또 “그러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그는 안식일을 지키도록 한 성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70 (178.5)
 1482년경에 프란시코 수도회 승려인 로안느 드 칼라브리아(Loane de Calabria)가 평신도 동료인 지오반니 다 이몰라(Giovanni da Imola)와 함께 이스킨 디르(Iskindir. 1478- 1494)왕이 다스리는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에는 많은 유럽인들이 이미 이 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해를 기다린 끝에 요안느 드 칼라 브리아는 젊은 국왕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시크코 알바레즈 자신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1520-1526) 이집트 출신의 감독인 마르코스(Margos)는 그에게 말하기를 국왕 이스킨 다르가 그 때에 특별히 안식일과 음식물의 법에 대한 에티오피아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바꾸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하였다.71 알바레즈는 1507년에 에티오피아의 헬레나 여왕의 구조 요청을 받고 폴투칼 국왕이 파견한 탐험 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홍해 연안의 모슬렘 족들로 부터 군사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탐험대는 1520년에 도착했다. 알바레즈는 국왕 레브나 뎅겔(1508-1540)과 아브나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여 안식일 준수와 음식물 법을 폐하는 문제까지도 함께 토론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72 탐험대는 에티오피아에 약 6년간 머물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그때 그들은 에티오피아의 사신으로 사가 자-압(자가 자부)을 대동하였으며 의사인 조아오 베르무데즈를 남겨놓고 떠났다. (179.1)
 1527년과 1534년 사이에 사가 자-압(Saga za-Ab)은 리스본에서 에티오피아의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는 사도들의 관례에 따라 두 날 곧 안식일과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 그 날에는 어떤 일을 하는 것도 불법이다. 안식일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를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으며 하나님이 그 날을 거룩함의 거룩함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므로 그 날을 큰 존귀와 헌신으로 기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교훈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다. 그의 말씀 보다는 하늘과 땅이 먼저 없어질 것이며 특별히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해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제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안식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셨던 은총을 지금은 우리들 그리스도인에게로 옮겨진 것이다. 우리는 주일을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지키고 있다.”73 (179.2)
 한편 동방에서는 술탄의 영지인 아달(Adal)의 모슬렘 군사 지도자 아만 이븐 이브라힘의 침략과 약탈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를 신앙하는 에티오피아에 파괴와 황폐와 비극이 초래되었다. 1529년에 그는 에티오피아 국왕 레브나 뎅겔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국왕은 1535년에 요아오 베르무데즈(Joao Bermudez)를 유럽에 파견하여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국왕은 포르투갈과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동정과 지원을 끌어내기 위하여 그가 교회의 특성이나 교리는 그대로 둔 상태로 에티오피아의 일성론적 교회를 로마 교회의 관할권 아래에 맡길 의사가 있음을 공표하였다.74 (179.3)
 베르무데즈 대사의 활동은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어내어 드디어 바스코 다 가마의 동생인 크리스토바오 다 가마가 지휘하는 400명의 포르투갈 군사가 1541년에 인도의 고아로부터 파견되어 홍해의 항구인 마사와에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에티오피아에서는 클라우디우스(1540- 1559)가 부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군대의 강력한 화력에 힘입어 모슬렘 군대를 패배시키고 침략자 아만 이븐 이브라힘을 살해할 수 있었다. (180.1)
 그러나 군사적인 승리를 획득하기가 바쁘게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결이 뒤따랐다. 베르무데즈는 에티오피아에 돌아와 있었는데 전국에 로마 교회의 의식을 강행하도록 고집하였다. 국왕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거부하였으며 베르무데 즈를 고아로 추방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프랑크족의 종교를 싫어 했던 것이다.75 (180.2)
 교황 율리우스 3세는 에티오피아를 로마 교회의 신앙으로 개종시킬 희망을 품고 1554년에 에티오피아의 총 감독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에티오피아에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곤잘레스 로드리게즈(Gonsales Rodriguez)와 두 명의 다른 예수회 수도승을 1555년에 에티오피아로 파송하였다. 국왕은 그들을 친절하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조상의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는 압력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거절하였다. 1557년에 드디어 예수회 출신의 안드레 데 오비에도(Andrd de Oviedo)가 가톨릭 신앙의 새로운 감독으로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왕실 연대기 편찬자에 따르면 “그가 목적한 것은 알렉산드리아로 부터 에티오피아로 전수된 참된 신앙을 비판하여 에티오피아에 로마 교회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려는 것이었다.”76 (180.3)
 국왕 클라디우스는 오비에도에게 그가 이미 일성론적인 감독인 아부나를 에티오피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오비에도와 그의 수행원들과 토론하여 “그들의 거짓됨을 증명하여 패배시켰다.”77 이 토론으로 말미암아 클라우디우스의 “신앙 고백”이라고 알려진 것이 나왔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그들에 앞서 이 지역을 다녀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교회가 유대인들의 관습과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대단히 포괄적인 신앙 고백의 문맥에서 그들의 그같은 비난을 논박하였다. 그는 안식일의 준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념하는 일에 관해서는 우리가 유대인들이 하는 방식으로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외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위에 떨어지게하소서’ 했던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물도 퍼올리지 않았고 불도 지피지 않았으며 음식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떡도 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날에 제사를 드린다. 즉 성찬의 예식을 치른다. 우리의 조상들과 사도들이「사도들의 교훈」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대로 아가페의 식사를 나눈다. 우리는 안식일을 준수하되 일요일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주일은 새 날이다. 다윗이 그 날에 대하여 말하였다. 주께서 만드신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하였다.”78 (180.4)
 클라우디우스는 한 세기 전에 자라 야코브가 택했던 노선과 유사한 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일요일을 안식일에 우선하는 날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을 포기하고자 하는 정신과는 너무 멀었다. 그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식과 에티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식을 날카롭게 구분하였다. (181.1)
 클라우디우스는 얼마 후인 1559년에 전사하였다. 그의 동생 미나스(Minas 1559-1563)가 그를 계승하였다. 앞서 클라우디우스는 모슬렘 침략자 아달 이븐 이브라힘을 물리치는데 크게 전공을 세운 포르투칼 병사들의 아내들과 노예들이 로마 가톨릭 신앙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으며 아비씨니아인들이 로마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용인하였다. 그러나 새 임금 미나스는 이것을 금지했으며 감독 오비에도가 그에게 도전하자 왕은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어렵게 참았다.79 (181.2)
 그때에「마사파 토마르」(“문자의 책”)가 아랍어 역본에서 번역되어 나타났다. 전설에 의하면「마사파 토마르」의 원전은 1050년 겨울에 로마에 있는 베드로와 바울의 교회에서 모든 중요한 사제들과 수많은 군중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80 “이 문자들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들을 다루고 있으며 더 직접적으로는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81 (181.3)
 미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사르차 뎅겔(Sartsa Dengel, 1563-1597)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부왕의 노선을 뒤엎고 오비에도를 보호하고 로마의 사제들을 관용하였다. 그리하여 심지어 본토인 사제들로 부터 그가 교황에게 에티오피아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82 (181.4)
 반(反) 안식일 파의 짧은 승리(1604-1632): 몇 년후인 1603년에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수도사 파에즈(Pero F. Paez)가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탁월한 능력의 소지자인 그는 에티오피아의 통용어인 게에즈(Geez) 말을 일년 안에 통달하였다. 그의 “양식과 기민함과 신중한 분별력”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악숨 근처의 프레모나트 수도원에 학교를 세우고 에티오피아 소년들과 포르투갈 소년들을 모두 받아서 로마 교회의 신앙을 가르쳤다. 교사로서의 파에즈의 명성은 곧 왕실에까지 알려졌다. 1604년 4월에 그는 새 임금인 자 뎅겔(1603-1604)에게 초빙되었다. 국왕은 종교적인 여러 쟁점들에 대해 참을성있고 우호적인 태도로 그의 주장을 경청하였다. 로마 교회 방식의 미사 제도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설교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교황에게 복종하기로 결심하였다.83 (181.5)
 로마 가톨릭 교회에 합류하려는 국왕 자 뎅겔의 결심은 그가 “누구도 더 이상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켜서는 안된다”는 칙령을 발표했을 때 모든 백성들에게 분명히 들어났다.84 왕은 칙령에 이어 교황 클레멘트 3세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왕 필립 3세에게 공한을 보내어 기술자들과 군인들과 또 자기 백성들을 교육할 더 많은 예수회 수사들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85 (181.6)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에티오피아 내부에서의 반발은 대단히 신속하고 격렬하였다. 아브나 페테르(Peter)는 국민들을 국왕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부터 해제하고 국왕 자 뎅겔을 파문하였다. 에티오피아의 과거 역사에 국왕이 파문을 당한 경우는 근친상간을 이유로 오직 한번이 있었다. 군사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 달이 되지 않아 1604년에 화기를 갖춘 200여명의 폴투갈 군사들의 지원을 받은 국왕은 1604년 10월의 전투에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86 (182.1)
 「사와나 나프스」(Sawana Nafs:“영혼의 피난처”)는 자 뎅겔 왕 시대에 네와야 마스칼이 자신의 유형지인 이집트에서 국왕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서한은 국왕에게 알렉산드리아의 신앙에 확고히 서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서한의 제2장에서 저자는 예수회 수사들에게 굴복하여 안식일을 배척한다면 이는 창조주의 율법과 사도들의 교회법을 모두 무시하는 것이라고 왕에게 호소하였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폐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혁신파”들을 대항하여 요한복음 5:18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주장하기를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식일의 파괴자로 비난했다고 하여 안식일 준수의 철폐를 정당화한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철폐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와야 마스칼의 논리는 “이그노라치오 엘렌키”(Ignoratio elenchi) 즉 “부당한 추리”라는 비난을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주장에는 여러 차례에 걸처 에티오피아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위해 나타냈던 깊은 헌신과 관심들이 다시 한번 나타나고 있었다.87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