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9장—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
 이에 대하여 유세비우스는 길게 대답하였는데 그 취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주님의 거룩한 날”은 주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 날은 모든 날들의 주인이므로 그 날을 주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날은 창조와 부활의 시작이며 한 주간의 시작이다. 이 세가지 “시작”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시작을 가장 잘 암시한다.19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하는 6일과 기도하고 쉬며 악한 행위들을 물리치는 한날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날에 일찍 교회로 가야 한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20 일을 쉬고 교회로 가야할 목적이 아니라면 주일을 지킬 이유가 없다. “주일에 치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고 법정에서 소송하고 일하며 맹세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맹세를 시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불로 저주를 받을 것이며 그들의 운명은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21 그는 또 일요일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려고 일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노예들과 삯꾼들과 소와 모든 것들이 일요일의 휴식을 필요로 한다22는 것이었다. (169.6)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곱틱(Coptic)문건의 한 파편에도 일요일 준수 방식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권고와 대단히 유사한 내용이 들어있다. “내가 권고하노니 거룩한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논쟁과 소송과 폭력행위에 개입하지 말고 성경을 주목하라.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영혼을 돌보거나 동물들을 보살피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거룩한 일요일에 무엇을 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23 일요일에 일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선언되기는 이경우가 처음인 것 같다. (170.1)
 교회사가이면서 미틸레네(Mytilene)의 감독이었던 자카리아스 스콜라스티쿠스(Zacharias Scholacticus. c. 465-536)는 그가 안디옥의 감독인 세베루스의 생애를 기록한「세베루스의 일생」(Life of Severus)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교인들은 일요일의 성찬 예배에 참석한다고 언급하였으며 또 일요일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라고 말했다.24 (170.2)
 이집트의 콥트 교회에는 6세기 부터 안식일 준수에 대한 언급이 알려지고 있지않다. 안식일과 일요일을 나란히 지키다가 일요일만 지키게 됨으로써 에티오피아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사이에 긴장이 조성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로스(Alexander Ross. 1590-1654)의 말이 맞다면 17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콥트 교회는 “도시밖에서는 주일도 지키지 않고 축일들도 지키지 않았다.”25 (170.3)
 그러나 안식일과 일요일 두 날이 준수되던 초기 관습의 일부는 여러 세기에 걸처 이른바 「이집트 교회 지침」(Egyptian Church Order)와 그밖의 유사한 저작물을 읽고 필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이집트 교회의 지침」은 히폴리투스(Hippolytus)의「사도들의 전통」(Apostolic Tradition)을 번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70.4)
 「사도들의 전통」의 희랍어 역본이 5세기 후반경에 콥트 지역의 언어인 사히드(Sahidic)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다.26 사히드어로 된 다음과 같은 법령이 발견되었다. “종들에게는 5일동안 일하게 하라. 안식일과 주의 날에는 교회에 가서 경건한 교훈을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을 쉬게 하라.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 친히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고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날이기 때문이다.”27 (170.5)
 「127개조의 사도적 교회법」(The 127 Apostolic Canons)의 여러 아랍어 사본들 가운데는 부활절 안식일이 아닌 경우에는 안식일과 일요일에 금식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고 있는 교회법 조항이 하나 들어있다.28 그런가하면 병자까지라도 부활절 안식일 금식에는 동참하게 해야 한다는 교회법도 있다.29 (171.1)
 이와같이 이집트 교회에서 안식일이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들에게 안식일과 일요일의 휴식을 명령한 법령이 중세 이집트에서 실시되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500년 이후는 이집트에서 일요일이 주간의 유일한 휴식의 날로 정착된 것 같다. (171.2)
 에티오피아 교회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
 기독교가 선교되기 이전의 에티오피아:기독교는 4세기 전반부에 현재의 이티오피아의 전신인 악숨(Aksum)왕국에 선교되었다. 기독교가 선교되기 전에도 악숨왕국에 제칠일 안식일이 알려졌을가? (171.3)
 아비시니안 기독교(Abyssinian Christionity:단성론주의의 기독교)안에 내포된 헤브라이-유대교적 요소들을 자세히 연구해온 에드와드 울렌도르프(Edward Ullendorff)는 기독교가 이 지역에 선교되기 이전에 악숨 왕국의 백성들이 이미 유대교의 신앙과 관습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가 이 지역에 수용된 이후에도 유대적 요소의 대부분들이 지금까지 계속 보존되어 왔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역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안식일의 준수, 제8일의 할례, 음식물 규칙, 언약의 궤, 그밖의 다른 “유대적 요소들”에 대해 설명할 길이 달리 없다는 것이다.30 (171.4)
 울렌도르프는 또 주장하기를 “남부 아라비아로 부터 이주해온 이민자들이 홍해를 건너오면서 악숨 왕국으로 이주시킨 셈 문화권에서는 유대적인 요소들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이주해 온 장사꾼들이나 정착자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포함되있거나 유대교 개종자들이 발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기간의 남부 아라비아 문명 전체에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헤브라이-유대적 혼합성에도 기인하고 있다.”31 그러나 그는 이같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신용할 만한 자료들을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171.5)
 안식일을 철저히 고수한 파라사인들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유대인이나 흑인 에티오피아 유대인들로 잘못 인식되어 왔으나 이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저항하고 악숨 왕국의 유대적 유산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증거들은 많다. 그들은 16세기에도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타나 호수(Lake Tana)북쪽에 살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이 언제부터 처음으로 유대교와 접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기독교가 이티오피아에 선교되기 이전에 안식일 준수의 관습이 이 지역에 전해지고 보존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171.6)
 4세기 부터 13세기 까지의 안식일과 일요일의 준수: 희랍교회와 로마교회의 여러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기독교는 4세기 전반부에 악숨 왕국에 선교되었다. 이 지역의 사도는 두로에서 온 프루멘티우스(Frumentius)라는 이름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로 동료 에데시우스(Edesius)와 함께 악숨의 한 항구로 항해해왔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서 국왕의 은총을 얻어 프루덴티우스는 드디어 국왕의 비서가 되었고 에데시우스는 왕의 술잔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그리스도인 상인들을 보호했으며 기독교의 선교를 지원하였다. 여러 해 후에 프루멘티우스와 에데시우스는 악숨왕국을 떠나도록 허가를 받았다. 에데시우스는 두로로 돌아갔으나 프루멘티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c. 296-373) 감독에게 악숨에 주교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다나시우스는 프루멘티우스를 안수하여 그를 그 지역의 초대 “아부나”(우리의 아버지)로 삼았다. 그 때로부터 “아부나”의 칭호가 에티오피아 대감독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340년경 국왕 에자나(Ejana)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악숨 왕국(이티오피아 왕국)이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32 (172.1)
 초기 악숨 교회사에서 안식일의 준수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프루덴티우스가 시리아계 그리스도인이었고 악숨 교회가 초창기 부터 이집트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집트 교회와 시리아 교회가 실천하던 안식일과 일요일의 두날을 준수하는 관습이 이티오피아 교회에서도 이행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72.2)
 기독교의 영향력은 5세기말 시리아의 선교사들이 악숨 왕국에 도착하면서 강화되었다. 이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노력의 결과로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들은 학교들을 세웠고 최소한 성경의 몇 부분들과 그 밖의 종교적인 서적들을 이티오피아의 언어로 번역하였다.33 그러나 안식일과 일요일의 두 날이 모두 전반적으로 준수되고 있었지만 이미 4세기에 이집트와 근동의 다른 지역에 반(反)안식일의 감정이 자라가고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리아와 거의 모든 이집트 지역들은 A.D.500년에 이르러 안식일의 준수를 완전히 청산하였다. (172.3)
 안식일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적대적인 결정은 악숨 왕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초기의 역사에서는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에티오피아에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집트 출신 성직자들이 계속해서 에티오피아 교회의 감독으로 부임해 왔기 때문에 에티오피아 교회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증대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에티오피아 교회 사이의 긴장을 알리는 낌새는 11세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알려졌다. 사위로스(Sawiros)감독은 이티오피아에 대한 보고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2세(Cyrill H. 1077-1092) 대 감독에게 이티오피아로 공한을 보내어 더 이상 “구약의 관습들을 지키지 말도록 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와 물론 안식일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1238년에 이븐 알-아살(Ibn al-Assal)은 이집트에 있는 콥트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교회 법령집」(Collection of Canons)을 완성하였는데 그 법령집에서는 “안식일의 준수가 유대인의 관습으로 분명히 배척되었다.”35 최소한 이때부터는 이집트 감독들이 에티오피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공식 노선을 강요하기로 작정한 것이 분명하다.36 (172.4)
 이「교회 법령집」은 에티오피아어로 번역되었고 그 지역 현상에 맞도록 변형되어 채택되었다.「페타 나가스타」(Fetha Nagast) 즉 “왕의 법률”로 알려진 이 법령집은 에티오피아에서 그 가치와 실천적인 중요성의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장에는 안식일 준수문제를 취급한 권위있는 교회 법령들이 소개되었다. 그 첫째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에 일해야 된다고 분명하게 명령한 라오디게아 공회의의 교회법 제29조이다. 그 다음에는 니케아 공회의의 교회법 제20조를 언급하였다.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37 그러나 그 다음에는「사도들의 교훈」(Didascalia)를 빙자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을 지키는 똑같은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켜야한다고 촉구하였다.38 (173.1)
 「페다 나가스타」는 또 콸레멘토스(Qualementos)를 인용하여 종들에게는 일주일 중에 5일만 일을 시키고 일요일과 안식일에는 교회에 보내어 경건한 가르침을 받게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다시「사도들의 교훈」을 인용하여 신자들은 부활절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안식일과 일요일에 성찬을 받도록 해야한다고 권고하였다.39 (173.2)
 「페다 나가스타」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우호적인 자료와 적대적인 자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안식일의 준수를 박멸하려는 기도의 배후에 있던 진정한 세력은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대감독이었다. 국왕 자라 야코브(Jara Yakob. 1424-1468)는 14세기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안식일의 준수는 이 왕국에서 시행되고 있지 않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의 관할 지역에서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다른 다섯 날들과 똑같이 생각한다. 그들은 또 안식일을 준수하는 모든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파문하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40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