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9장—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
 약 3년에 걸친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에 왕위는 수센요스(1607-1632)에게 돌아갔다. 이 새 왕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예수회 수사들의 지성과 학문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88 그는 로마 교회 신앙에 대한 제한을 완화시켰으며 사람들이 로마교로 개종하는 것도 허용하였다. 교황과 스페인 국왕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도 보냈다.89 (182.3)
 1612년에 국왕 수센요스는 로마 카톨릭 신자가 될 것을 개인적으로 결심했다. 알렉산드리아 신앙(일성론)과 로마 가톨릭 신앙의 결정적인 차이점인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개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예수회 수도사들이 이겼다. 국왕은 이러한 결과에 고무되어 그의 백성들에게 로마 가톨릭 신앙을 수용하도록 자유를 베푸는 칙령을 반포하였다.90 (182.4)
 에티오피아의 대감독 시므온과 여러 귀족들과 많은 사제들이 반란을 결심하였다. 1617년에 국왕 수센요스는 반란 세력을 패배시키고 1620년에는 안식일 준수가 유대교 신앙이며 기독교와 모순되는 신앙이라고 정죄하여 안식일의 준수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칙령에 대한 익명의 반박문이 나왔는데 이에 너무 격앙한 국왕은 안식일 준수를 금지시켰던 칙령을 더 강화하는 새 칙령을 반포하였다. 농사꾼들에게는 안식일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했으며 범법자들에 대한 처벌을 추가하였다. 초범인 경우에는 폴투갈 화폐로 1파탁 값어치의 천으로 짠 옷을 몰수하고 두 번째로 칙령을 어기면 재산을 몰수하였다.91 왕의 칙령을 강행키 위하여 안식일에 일하기를 거부했다고 고소당한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때리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가했다.”92 그리고 그는 주요 귀족들과 군대 사령관들에게 자기는 조국의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라 개혁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안식 일의 준수를 폐지 했다고 대답했다.93 (182.5)
 국왕의 “안식일에 대한 모독”에 항거하는 무장 반란이 번져갔다. 그러나 국왕은 반란군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이같은 승리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백성들에게 왜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앙 노선을 포기하고 로마 교회의 신앙노선을 채택했는지의 이유를 밝히고 자신의 선택을 따르도록 백성들에게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반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94 (183.1)
 수세요스는 교황 바울 5세로 부터 회신을 받고 1623년 1월 31일자에 다시 로마 교황에게 대하여 교회의 세계적인 목자로 복종할 것을 약속하고 또 에티오피아에 로마의 감독을 파견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95 그리하여 1623년에는 더 많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로 들어왔다. 그리고 1624년에는 로마측의 감독으로서 알폰소 멘데즈가 도착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였지만 엄격하고 비타협적이며 속이 좁고 비관용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96 멘데즈는 “수센요스와 그 아들들과 관료들과 사제들에게 1626년 2월에 로마 교회 신앙으로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교황에게 복종할 것을 엄숙히 서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교회에 여러 가지 변화를 도입하였다.”97 무엇보다도 토요일이 금식 일로 바뀌 었다.98 (183.2)
 갑작스러운 변화는 국왕에 대한 반대 여론을 더욱 자극하였으며 결국 이것은 종교적인 내란으로 확대되어 나라를 황폐시켰다. 국왕은 예수회의 반대자들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신앙에 모순되지 않는 모든 옛 관습들이 허용되었다. (183.3)
 수센요스는 반란군에게 한차례 더 승리를 쟁취한 후 그의 아들 파실라다스와 다른 신하들로 부터 그의 백성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중지하라는 압력을 받고 1632년 6월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4세기에 기독교가 이 나라에 들어온 이후 계승되어온 에티오피아의 종교적 신앙전통(안식일 준수를 포함)을 바꾸려 했던 가장 강력한 시도가 중단되 었다. (183.4)
 수센요스는 이 해의 9월에 로마 카톨릭 신자로 죽었다. 새 임금 파실라다스(1632-1667)는 예수회 수도사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고 “카톨릭의 책들은 발견되는 대로 불태우고 예수회 수도사이든지 카푸킨 사제이든지 그들과 관련된 누구든지 목베고 목매달기를”시작했다.99 그의 아들인 요하네스1세(1667-1682)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1669년에 모든 카톨릭 교도들을 에티오피아에서 축출하였다.100 (183.5)
 에티오피아는 이때부터 상대적인 고립시대로 들어갔다. 17세기 부터 오늘날까지 안식일의 준수는 중단 없이 계속되 왔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의 질적인 내용은 에티오피아의 여러 지역에 따라 한결같지가 않았다. (183.6)
 요 약
 4세기의 이집트에는 안식일과 일요일이 모두 준수되었다. 그러나 일요일이 우선적인 날이었다. 38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안식일과 일요일 두 날에만 성찬식이 베풀어졌으며 안식일은 부활절 안식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금식일로 생각되지 않았다. 400년경까지 이집트의 수도원들에서는 안식일과 일요일 이외의 날에는 저녁 예배와 밤 예배 이외의 공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184.1)
 5세기 전반부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함께 모여 “거룩한 신비”(성찬식)를 기념하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인접 교회들과 이집트의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안식일 저녁의 “신비의 모임”(성찬식)에 참여하였다. (184.2)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이처럼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대감독 키릴(412-444)의 치세 기간에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을 적대하는 소요가 발생하여 결국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해야했던 사태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세기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는 따뜻한 것이 못됐다.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이집트 교회는 안식일 준수의 모든 형태를 포기하였다. (184.3)
 악숨 왕국(에티오피아)에는 4세기에 기독교가 선교되었다. 그리고 초창기 부터 악숨 왕국의 교회는 안식일과 일요일을 나란히 휴식의 날로 지켰다. 그런데 11세기부터 그 인접한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에티오피아 교회에게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본보기를 따라 안식일의 준수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후반부에 이르러 에티오피아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184.4)
 14세기 전반부터 유스타티우스 국왕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안식일을 준수하려는 세력이 증대되어 갔다. 그리고 드디어 15세기 전반부에 이르러 국왕 자라 야코브에 의하여 안식일을 일요일과 함께 안식의 날로 존중하게 하는 법률적 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84.5)
 15세기 마지막 25년 동안에 최초의 로마카톨릭 사제들이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1541년에는 400명의 포루투갈 군인들이 모술렘 침략자들과 저항하기 위한 국왕 레브나 뎅겔의 간절한 호소에 의해 에티오피아로 들어왔다. 모슬렘 침략자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 후에 처음에는 베르무데즈가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오비에도가 국왕 클라우디우스와 미나스에게 로마교회에 굴복하여 따르도록 하고 특히 안식일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4.6)
 예수회 수도사 파에즈(P.F.Paez)는 국왕 자 뎅겔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신앙을 수용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국왕은 1604년에 안식일의 준수를 금하는 칙령을 포고하였다. 그러나 뒤따라 일어난 반란으로 왕이 죽자 파에즈는 또 새 임금 수센요스의 신임을 얻어내어 왕으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신자가 되게 하였다. 수센요스는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일하도록 명령하고 거의 모든 무장 반란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1622년에 파에즈가 죽은 다음에 에티오피아에 부임한 대감독 알폰소 멘데즈의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가톨릭 강압 정책이 반(反)예수회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국왕은 반란군에게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후 완전한 종교자유를 선포하고 왕위를 양위하였다. 그의 아들 파살라다스는 예수회 수도사들을 나라밖으로 추방하였다. 다음 왕 요하네스는 1669년에 모든 카톨릭사제들을 왕국밖으로 추방했다. 17세기 이후 에티오피아는 중단 없이 안식일과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콥트교회에 관한 한 오늘날 진정한 안식일 준수는 주로 북부지방의 농촌지역에 국한되고 있다.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