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2 장 창조의 안식일인가? 의문의 안식일인가? 제 1 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역사에 나타난 창조 안식일
 이런 견해는 본래의 전통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유대의 종교를 포기하라는 헬라의 압력에 직면하여(특히 엔티어커스 에피파네즈 시기에, 175 B.C.) 유대인의 신원을 보존할 필요성에 의해서 고무된 두 번째 단계의 발전에서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비록 팔레스틴의 문서에서조차도 안식일의 창조적 기원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는 사실은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한편으로 희년서(140-100 B.C.경)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만” 안식일을 지키도록 허용하셨다(2:31)고 말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을 지키시고 그날을 모든 세대를 위해 거룩하게 하셨으며, 또 그날을 당신의 모든 일을 위한 한 표징으로 지정하셨다”(2:1)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39.1)
 헬라시대의 유대인의 문헌은 안식일이 온 인류를 위한 창조의 법이라는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필로(Philo)는 안식일의 기원을 창조로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세상의 생일”로 부르며 기뻐한다.11) 필로는 창조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세계가 엿새 동안에 창조되었으며,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일을 중단하시고 그가 아름답게 창조한 것들을 명상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그분께서는 이러한 세상 질서 아래 있는 시민들로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다른 물질계에서처럼 이 곳에서도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고 명하셨다”12)고 설명한다. 안식일이 창조 때부터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필로는 그 날이 “한 도시나 한 나라의 축제가 아니라 온 우주의 축제이며, 그 날만이 모든 백성들에게 속한 공식적인 날로 엄격히 불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13) (39.2)
 초대 교회의 창조-안식일
 안식일의 창조적 기원에 대한 이해는 초대교회의 여러 문서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시리아어 교훈서인 시리악 디다스칼리아(Syriac Didascalia, A.D. 250)에서는 창조주일에서 일요일이 안식일 보다 더 후에 나오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보다 “더 큰 날”로 잘못 제시되고 있다. 창조의 첫날로서 일요일은 “세상의 시작”14)을 나타낸다. (39.3)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년 경)의 작품 가운데 나오는 안식일과 할례(On the Sabbath and Circumcision)라는 문서에서 안식일에 비해 일요일의 우월성이 창조 대 재창조의 기초에 대해 논쟁하면서, “안식일은 첫째 날의 끝인 반면, 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옛것을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둘째 주의 시작이었다”15)고 말한다. 안식일과 일요일을 준수하는 자들이 그들이 준수하는 날의 합법성과 우월성을 방어하기 위해 창조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창조와 관련된 말씀을 통해 나름대로 그 날들의 역할들에 대해 호소하므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날들을 옹호하고 있다. (39.4)
 소위 성 사도 헌법(Constitutions of the Holy Apostles, 380년 경)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고, 주의 날은 부활의 기념일이기 때문에 이 두 날의 축제를 지켜라”16)는 권고를 받고 있다. 창조 안식일에 대한 여러 다른 언급들이 같은 문서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기도는 “오 전능하신 여호와여 당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안식일을 제정하여 그 날을 기억하도록 하셨사온데 그 이유는 그 날에 당신의 법을 명상하도록 당신은 우리의 일들로부터 우리를 쉬도록 하셨나이다”17)라는 말로 시작한다. (39.5)
 장 다니엘루가 주목한 것처럼, 창조 안식일의 주제는 “어거스틴 사상의 중심부에도” 있다18).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게는, 안식일의 쉼에 있는 창조 주일의 절정은 의미심장한 두 개념을 전개시키는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그 첫째는 최종적인 안식일의 쉼과 하나님과의 평화를 향한 세상역사의 전개 개념이다. 다른 말로는, 영원한 쉼의 실현은 어거스틴에게는 창조의 시작 때에 여호와께서 입증하신 안식일의 성취를 타나내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신의 일들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말한다.19) (40.1)
 창조 안식일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은 하나님 안에서 쉼이 없는 인간의 영혼이 쉼을 누리는 신비적 과정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거기에 꼭 맞는 한 예가 자신의 참회록(Confessions)의 가장 탁월한 한 장(章)에서 발견된다. 그는 참회록 기도 가운데서 말하기를 “오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 쉼의 평화, 안식일의 평화, ‘저녁’이 없는 평화를 주셨나이다.20)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사물의 순서는 작정된 그 자체의 목적들이 완성될 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아침’‘저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저녁’이 없으며, 거기에는 황혼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는 그날이 영원히 존속되도록 거룩하게 하셨나이다. 당신의 일이 완성된 후 일곱째 날에 당신의 쉬심은 당신의 책의 소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언하시며, 우리는 또한 당신의 관대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일들이 완성된 후에는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쉬렵니다”21)고 한다. 창조 안식일에 대한 이 신비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은 어거스틴이 비록 그가 넷째 계명의 문자적인 준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안식일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22) (40.2)
 중세시대의 창조-안식일
 창조 안식일에 대한 어거스틴의 영적인 해석(靈解, spiritual interpretation)은 중세시대까지도 어느 정도 계속되었다.23) 그러나 새로운 전개는 주 후 321 년에 있었던 콘스탄틴의 일요법(Constantinian Sunday Law)이 있은 후에 일어났다. 일요일에 일하는 것으로부터 쉬기를 요구하는 황제의 법이 신학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지도자들은 빈번히 안식일 계명에 호소하여 그 날을 일요일 준수에 해당 될 수 있는 창조의 법으로 해석하곤 했다. 크리소스돔(Chrysostom, 347-407년 경)은 이런 전개를 자신의 창세기 2:2의 주석에서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분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라고 한 말의 실제적인 뜻은 무엇인가? . . . 하나님께서는 주일의 날들 가운데 한 날이 뽑으셔서 전적으로 영적인 일을 위해서 바치도록 하셨다”24)고 반문한다. (40.3)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곱째 날을 특별한 날로 준수하는 것으로부터 칠일 중에 한 날을 쉬도록 하는 원칙으로 창조 안식일을 축소한 것은 안식일 계명을 일요일 준수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피터 코메스톨(Peter Comestor, 1179년경 사망)은 이러한 적용을 옹호하면서 창세기 2:2의 기초는 “비록 법 앞에서도 안식일은 언제나 모든 국가들에서 준수되었다”25)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안식일을 창조와 우주적인 법으로 인정하는 것은 일곱째 날의 준수를 권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요일의 준수를 승인 받고 또 규칙적으로 하기 위한 동기였다. (40.4)
 중세 후기의 신학에서, 안식일 계명을 일요일 준수로 문자적으로 적용한 것은 넷째 계명 안에 있는 도덕적인 국면과 의문의 국면 사이를 구별하는 새로운 해석에 기초하여 정당화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 경)는 자신의 핵심신학(Summa Theologia)에서 이러한 인위적인 구별을 가장 정교하게 만든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논증하기를 “안식일 준수의 법은 하나님의 사물에 어떤 시간을 바치도록 사람을 명하는 한 도덕적이지만. . . 그러나 고정된 시간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의문의 법이다”26)라고 한다. (40.5)
 도덕법과 의문법의 차이점?
 예배를 위해서 한 날을 떼어 인간이 도덕적인 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일곱째 날을 구별하고 있는데 어떻게 넷째 계명이 의문 법 이 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아퀴나스에게는 안식일의 도덕적 국면은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와 쉼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제시된 시간은 자연 이성에 일치한다는 것이다.27) 다른 말로 말하자면, 안식일의 의문의 국면은 “창조”를 기념하는 일곱째 날의 상징성과 “은혜로 말미암는 현재의 생애나, 영광으로 말미암는 미래의 생애 어느 것이든지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예시”에 의해서 결정된다.28) (41.1)
 그렇다면 어떻게 안식일이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창조와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쉼을 상징하기 위한 의문의 법(변경이 가능한)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떼어놓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재 보증이 아닌가? 의문의 법으로 거절하는 것은 일곱째 날 안식일의 본래의 기별,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쉼과 평화, 그리고 교제를 주시는 완전하신 창조주이시라는 기별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바치는 어떤 도덕적인 기초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41.2)
 아퀴나스는 스스로 안식일과 “그리스도의 미래의 고난의 표징”이 되는 유월절과 같은 구약의 다른 상징적인 축제들 사이를 구분하므로 자신의 논리가 부 적절하다는 것을 분명히 시인하였다. 아퀴나스는 설명하기를 후자는 “일시적이고 변경이 가능한 것이며. . . 결과적으로는 다른 어떤 제전들이나 희생 제사들도 아니고, 안식일만이 십계명의 법에 언급되어 있다”29)라고 한다. (41.3)
 아퀴나스의 안식일의 의문의 국면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법을 폐지하지 않으셨으나, 그러나 법의 의도와는 상반되게, “사람이 안식일에 비록 친절한 일을 행하는 것조차도 삼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미신적인 해석을 폐지하셨다”30)라는 조언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불확실성은 대부분 잊혀졌고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의문적 구별은 일요일과 성 일들의 준수를 소개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근거가 되는 표준 이론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랍비의 안식일과 흡사한 일요일 준수를 위한 합법적인 제도를 고안해 내게 되었다.31) (41.4)
 루터교회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은 안식일의 도덕적(창조적)인 국면과 의문(모세의)의 국면 사이를 구분하는 아퀴나스의 구분에 대한 새로운 수정안을 제안했다. 그들의 입장은 일요일의 율법적이고도 미신적인 준수와 다수의 성 일에 대한 반대와 함께 신구약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41.5)
 루터와 몇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 뿐만 아니라 앤드리어즈 칼스타트(Andreas Karlstadt)32)와 함께 같은 좌파 개혁자들에 의해 증폭된 율법적인 안식일 준수자들에 대한 공격적인 정신을 가지고, 안식일을 모세의 법, 특히 “유대 백성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것”33)으로 공격했다. 일요일은 루터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가 아니라 “교회가 불완전한 평신도들과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34)“적어도 주일 중 하루를 쉬면서 예배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자”35)를 위해 교회가 정한 편리한 날로 남아 있었다. 이런 입장은 주로 구약과 신약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