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3장—죽음의 쇼파르
 이러한 두 증인의 통일성과 상호 보완의 원칙은 그것이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다니엘가 없이는 계시록은 모호한 책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계시록에는 다니엘에 대한 다양한 인유(引輸)와 언급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책과 동일한 관점을 공유하고 동일한 언어, 상징, 동일한 예언적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시록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133.1)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11장 1~14절은 이러한 상호보완성의 두드러진 사례를 보여 준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기간들은 다니엘에 나오는 예언의 시간표들을 반영한다(2, 3절). 양쪽 모두 1,260일, 또는 그와 같은 기간인 42개월(42 × 30) 동안 지속되는 탄압의 기간에 대하여 말한다. 다니엘은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박해의 기간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단 7:25). 다니엘의 문맥에서 이 기간은 한 해(360일), 두 해(360일 × 2) 그리고 반 년(360 일 ÷ 2), 도합 1,260일/년을 의미한다.26 박해의 기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요한은 다니엘를 연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한다. 작은 뿔이 성도들을 짓밟았듯이(단 8:10)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계 11:2)을 것이라고 한다. (133.2)
 두 예언은 동일한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실제로 1,260년 동안, 즉 교회가 정치권력을 얻은 때로부터(기원후 538) 그 정치적 영향력을 흔드는 사건들이 있기까지(기원후 1798), 성경의 증언이 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다. 이 기간 내내, 계시록에 의하면, 그 두 증인은 “베옷”(계 11:3)을 입고 예언한다. 그 후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공격하여 죽인다(7절). 우리 드라마의 “영적인” 장면이 성경 역사에 관련된 유명한 세 장소와 연관되어 일어난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세력을 나타내는 “큰” 성 바벨론과(계 14:8),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애굽과, 도덕적 부패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화신(化身)인 소돔이 바로 그곳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그 곳들에서 대체되고, 부정되고, 단순히 무시되면서 죽임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증인들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다. 박해는 결국 하나님을 죽이는 데(deicide) 도달한다. 계시록은 이 지역들에서 또 다른 골고 다를 본다.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133.3)
 프랑스 혁명은 공식적인 종교를 유린하는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 근원들에도 그렇게 하였다. 이성(理性)이라는 새로운 종교는 성경을 파괴하고 그 책에 영감을 주신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군중은 공개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책들을 불태웠다. 당시의 신문인 르 모니퇴르(Le Moniteur)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어제, 세기적인 날에 미신의 마지막 흔적을 닦아냈다. 마을 광장에서 점화된 큰 불은 거룩한 초상화들과 그림들을 태우는 불꽃의 화관(花冠)으로 타올랐다. 사람들은 5천에서 6천권이 넘는 종교 서적들을 불속에 던지고, 공화정의 노래를 부르며 보편적 결속의 슬로건들을 외쳤다. 책들은 도처에서 회수되었다. 심지어 마을의 유대인들까지도 그들이 보물로 여기던 필사본들을 가지고 나왔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어리석은 희망을 부인하였다. 불탄 책의 수는 너무 많아서 그 불은 밤까지 이어지고 오늘 아침 10시까지 계속되었다.”27 (134.1)
 마침내, 1793년 11월에 혁명 대표자들은 모든 종교 의식을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누군가가 공식적으로 기독교의 최후를 선언하였다. “이성은 광신주의에 대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오류와 피흘림의 종교는 타도되었다. 열여덟 세기 동안 그것은 하늘의 이름으로 땅을 유린해 왔다. ∙∙∙ 십자군 원정, 발도 파(Waldensians), 알비주아 파(Albigensians),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 성 바돌로매 학살, 이것들이 그것의 작품이요. 트로피 들이다. 그것은 지면(地面)에서 사라질지어다!”28 (134.2)
 역사는 뜻밖의 결과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의 증언을 억제했던 교회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반작용의 폭발을 불러 그 성경들을 불태웠다.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경시함으로써 교회는 박해자가 되고 그 스스로를 파괴할 자를 불러왔다. 그 파괴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써 그 기관들을 공격할 뿐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교회까지 공격하였다. 예언에는 계시록 전체에 퍼져 있는 교훈이 들어 있다. 죄악은 자기 자신의 심판을 낳는다는 것이다. (134.3)
 그러나 계시록에는 볼 것이 더 있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자들에게 위로부터 내리는 심판이 더해진다. 하나님의 심판의 충격은 두 배이다. 먼저, 큰 지진이 “성”(계 11:13), 곧 큰 성 바벨론을 흔든다. 그 찬탈의 세력은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우리는 지금 1798년, 교회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 영적 지도자인 교황은 투옥되는 때를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충격은 치명적이지 않다. 성의 “십분의 일”만 무너지고 “칠천” 명이 죽음을 당한다(13절). 이 두 재난은 성경 전통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십분의 일은 최소한이라는 개념을 상징한다.29 지진은 성읍의 작은 일부에만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칠천”명의 사람들을 “남은 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30 그러므로 교회는 그 타격을 속히 회복할 것을 의미한다. (135.1)
 하나님의 백성과 증인들 또한 다시 살아난다. 계시록은 부활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으로 이 사건을 묘사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암시 후에 본문은 그분의 부활에 대한 반향으로 옮 겨간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11절). 성경에는 같은 표현을 에스겔서에 나오는 부활의 기적을 묘사하는 데서도 사용한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겔 37:10). “삼 일 반”31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지낸 시간을 생각나게 한다(막 9:31; 요 2:19~22). 그 다음에 따르는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 후 그분이 승천하신 것을 암시한다.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계 11:12: 참조 행 1:9). (135.2)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형 법령이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랑스와 다른 서방 정부들은 관용과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왕정복고 때 입법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저술가이며 정치가인 카미유 조르당(Camille Jordan)은 1797년 500인회에서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국가를 위하여 질서와 안정을 가장 잘 보장해 준다. 그것은 가장 좋은 법률로도 대신할 수 없다. ∙∙∙ 우리의 모든 시민이 오늘 완전히 안심하도록 하자. 침례/ 세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든 가톨릭,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입법의 취지이고 법률의 취지임을 알게 하자. 나는 여러분의 이름으로 그 성스러운 약속이 갱신되기를 기원한다. 프랑스에서 모든 종교는 자유이다.”32 (135.3)
 유대인들을 위하여 프랑스 혁명과 그 계승자인 나폴레옹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 군대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게토로부터 해방시키고 온전한 시민의 자격을 주었다.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종교재판을 금지하였고, 마라노16)들은 다시 그들의 유대교 신앙을 선언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는 또한 성경의 귀환을 목격하였다. 수 년 전 볼테르는 성경을 “작년의 달력”이라고 폄하하면서 그것의 멸절(滅)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책장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되찾았다. 두 증인은 죽은 지 정확하게 예언적인 삼일 반 만에 다시 소생하였다.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그들은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성경은 1등 베스트셀러이다.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단순히 생존한 정도를 넘는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공산주의와 대면해서도 살아 남았다.

16) 중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강제에 의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역자 주).
(136.1)
 하나님의 진노
 일곱째 쇼파르는 인간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셋째 화”(계 11:14)를 선고한다. 직전의 이상에서는 일곱째 쇼파르가 울릴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을 예견하였다(계 10:7). 계시록에서는33 감추어진 의미를 나타낼 때 종종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34 비밀이 의미 있게 되는 것은 마지막에 가서이다. 그 때 예언은 그 성취를 만난다. 그렇게 일곱째 쇼파르는 여섯째 인을 반향한다. 둘 다 마지막 때와 관계가 있고, 그 때 모든 예언들은 그 완결에 도달한다. 그리고 둘 다 이때를 동일한 말로 선포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때요 열방의 심판의 때라고 하는 것이다(계 11:18: 참조 6:15~17). (136.2)
 그러나 두 이상 사이에는 대조되는 점들이 있다. 첫째로, 여섯째 인이 땅의 장면에 대하여 막을 여는 것에 비하여 일곱째 쇼파르는 하늘의 장면을 연다. 둘째,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섯째 인에서는 이상이 땅에서 하늘로, 현재에서 미래로 진행된다. 그러나 일곱째 쇼파르에서는 반대로 이상이 전형적인 히브리식으로 하늘 에서 땅으로 진행된다.35

  (136.3)
 쇼파르의 이상은 시간상 세 단계를 거쳐서 진행된다. 첫째는 모든 것들의 최후를 알리는 “큰 음성들”로 울린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계 11:15). 이 부분은 또한 요한계시록 4장의 주제들을 공유한다. 동일한 경배의 예식, 동일하게 보좌에 앉은 24장로들(계 11:16; 참조 4:4) 그리고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계 11:17; 참조 4:8)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호도 동일하다. 본 구절에는 “장차 오실”자라고 하는 언급은 빠져 있다(참조 계 4:8). 이에 대해서는, 파루시아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요한계시록 4장의 예배에서는 네 생물의 상투스(Sanctus), 즉 찬양이 24장로의 간섭에 앞서 있었다. 24장로의 찬미를 끌어들이는 큰 음성들은 네 생물의 음성이다(계 11:15). 그들은 우리가 보았듯이 땅의 피조물들을 대표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최종 목적대로 온 창조계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선포하는 순간이 왔다. 이제 하나님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다스리실 수 있다. (137.1)
 24장로는 이제 심판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들을 모두 회상하면서 경배로부터 기념으 로 옮겨간다(참조 계 14:14~20). (137.2)
  a. 부정적인 면에는 죽은 자들의 심판과 분노한 “이방들”“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계 11:18)의 멸망이 포함된다. 그 예언은 계시록 뒷부분에 나오는 이상들(계 20:12~15)에서 천 년 후에 이러한 사건들이 완결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다. (137.3)
  b. 긍정적인 면에는 “성도들”의 심판과 그들이 받는 상이 있다(계 11:18). 이 부분은 파루시아 때에, 천년기 전에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본향을 데려갈 때 실현된다. 여기서도 이상은 뒤에 나올 구절을 암시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138.1)
 사실 그 두 심판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제거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땅을 구원하신다. (138.2)
 여기서는 생태학이 이슈가 아니다. 우리는 땅에 대한 언급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계시록, 특히 여섯째 인과 상응하는 본문에서 땅은 대적의 위협을 받는 남자와 여자들을 의미한다(계 7:3). 그리고 다섯째 쇼파르에서 “땅의 풀,” “푸른 것,” “각종 수목”은 하나님의 인으로 표를 받은 사람들을 대표한다(계 9:4). (138.3)
 땅의 멸망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이다. 실로 그것은 이방들이 하나님에게 분노한 결과이다. “분노”라는 말 자체에 이미 소원한 관계가 시사되어 있다. 그 구절은 시편 2편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다시 얻기 위하여 돌아올 때 그의 특성을 묘사하는 시이다(시 2:5). 한편 본 구절에서는 이방들의 분노에 대하여 말한다. 열방은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장하면서, 그 정당한 소유주인 하나님이 가지셔야 마땅한 분노를 나타낸다. 땅과 하늘의 주(主)로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그분의 자리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방들은 땅을 망하게 하였다. 우리는 찬탈자들이 항상 가지는 특징인 그 동일한 불관용과 억압을 다시 볼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서로 죽인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거부하니 필연적으로 십자군 원정, 종교재판 그리고 광신도와 국수주의자들의 파시즘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땅을 구원하는 것과 같다. (1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