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3장—죽음의 쇼파르
 요한은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열렬히 받아서 먹는다(계 10:8, 9). 그 말씀이 소화되고 흡수된다. “펴 놓인 책”은 전에 인봉되었으나 지금은 읽을 수 있게 된 다니엘를 나타낸다. 요한의 경험은 그 또한 빛나는 천사를 대면하고 책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선지자 에스겔의 경험과 비슷하다(겔 3:1). 그 다음 절들은 그 이상한 명령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소화한 선지자는 이제 그 기별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4~6절). (128.1)
 그러나 두 경험 사이에 우리가 아직 더 주목해야 할 다른 유사점이 있다. 요한처럼 에스겔에게도 그 두루마리의 맛이 달기가 꿀 같았다(3절: 참조 계 10:9, 10). 그러나 두 경험에서 모두 뒷맛은 쓰다. 그 책에는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기별의 일부로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겔 2:10)이 들어 있다. (128.2)
 “끝났도다! 끝이 이르렀도다!” 선지자는 선언한다(겔 7:2, 3, 6). 유수(지) 중에 있는 선지자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린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웠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파수꾼을 삼으시고(겔 33:2) 그분의 백성에게 그 민족에게 임박한 파멸을 경고하신다. 에스겔의 기별은 말과 비유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낸다. 그의 눈에 기뻐하는 아내가 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겔 24:15~27). 그러고 나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그 성이 함락될 때까지 잠잠히 애곡하라는 선고를 받을 것이다(겔 33:22).

  (128.3)
 그러나 그 명령과 멸망의 위협의 중심에는 소망의 약속이 들어 있다. 에스겔은 회복의 선지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포로들은 풀려나고 지파들은 다시 통일될 것이며(겔 37:21), 예루살렘은 재건되고(겔 40~48), 땅은 사람들로 번성하게 될 것(겔 47:12)이기 때문이다. 남녀들은 새 마음을 얻을 것이다(겔 36:24~28). 선지자는 그 사건을 하나의 부활로서 예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뼈들에게 다시 생명을 돌이킨다(겔 37장). 세계는 다시 한 번 창조의 기적을 목격한다. 창세기 2장 7절에서처럼 생기(즉 성령)는 흙을 생명으로 변화시킨다(겔 37:9). (128.4)
 계시록이 에스겔서를 인용하면서 여기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심판과 창조의 달면서도 쓴 기별, 바로 킵푸르의 기별이다. (129.1)
 다니엘와 계시록의 통찰은 “마지막 때”의 계시라는 한 점에 모인다. 다니엘은 그 때를 킵푸르, 즉 심판과 재창조를 떨림으로 기대하는 시간에 비유한다. 계시록은 그 기간을 달면서도 쓴 맛을 가진 “펴 놓인 책”의 이상을 통하여 묘사하는데, 그것은 킵푸르의 본질을 특징짓는 심판과 재창조의 이중적 기별을 생각하게 한다. (129.2)
 다니엘와 계시록은 서로 보완하는 책이다. 천사가 요한에게 다니엘를 먹으라고 요구한 것도 그 두 책의 상호 의존성을 더욱 강조해 준다. (129.3)
 이제 요한이 “펴 놓인 책”의 기별을 소화하고 나니 천사는 그에게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계 10:11) 예언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나중에 비슷한 말을 14장에 가서도 들을 것이다. 그 하늘의 기별자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예언하여야 한다. 거기서도 다시 그 기별은 이중적이다. 심판의 기별이면서 또한 재창조의 기별이다.21 계시록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이 다니엘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라고 제시한다. 바로 계시록 자체에 의하여 “소화된” 기별이다. (129.4)
 두 증인
 다음 이상은 우리를 다시 에스겔서 예언의 문맥으로 데려간다. 히브리 성경의 선지자가 그랬 듯이 요한도 미래의 예루살렘 성전을 척량하기 위한 막대기를 받는다(계 11:1; 참조 겔 40:3이하). 일곱 인의 주기는 이러한 상징적 몸짓을 설명해 준다. 여섯째 인 후에 그 이상은 잠시 본론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인을 맞고 구원을 확증 받는지 이야기하였다(계 7:3). 마찬가지로 여섯째 쇼파르가 울린 후 선지자는 잠시 멈춰서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고 그것의 회복을 선언한다(계 11:1; 참조 슥 2:2). 더 상세히 말하자면, 천사는 요한에게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한다. 그 이상은 온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예언”할 사명을 받았다(계 11:3). 그들은 마지막 때의 백성과 동일한 사명, 즉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증거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이제 더 확장된다. 그 신탁(神託)은 이 “선지자들”의 나라를 “두 증인”(3절)에 비교한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4절). (129.5)
 스가랴 선지자는 이와 비슷한 두 감람나무와 므노라의 이상을 이야기하였다(슥 4:1~6, 11~14). “이것들은 무엇이니이까?”(4절)라는 그의 질문에 천사는 대답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라고 말한다. 천사의 설명은 감람나무의 형상으로부터 므노라까지 계속된다. 위로부터 오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발하듯이, 므노라는 위로부터 부어지는 기름의 효과로 빛을 낸다. (130.1)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빛에 비유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잠언은 토라를 빛, 즉 오르(or)와 연관시켜서 언어유희를 만들어낸다. 두 히브리어 단어(토라오르)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 신약은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한다(요일 1:5).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빛으로 소개할 때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또한 토라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다)이라는 역동적인 문맥 안에서 그렇게 한다(요 8:12; 12:35; 참조 시 119:105). (130.2)
 감람나무와 므노라의 주제에서 구약에 대한 또 다른 암시를 볼 수 있는데, 두 증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이적이 히브리 성경의 중요한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물이 피로 변하는 것과 재앙들은 모세를 가리킨다(계 11:6; 참조 출 7:14~18). 원수들을 삼키는 불과 초자연적인 통제 아래 있는 비는 우리에게 엘리야가 생각나게 한다(계 11:5, 6; 참조 왕상 17:1). 이 두 인물이 함께 나오는 구약의 유일한 다른 사례는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에 나온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4~6).

  (130.3)
 이 구절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먼저는 모세와 과거를 가리킨다. 그것은 옛 언약을 기억하고 거기에 신실할 것을 촉구한다. 모세는 여기서 구약을 대표한다. 요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세를 구약의 계시와 관련지었다.22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토라는 그와 함께 시작되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아 그것을 여호수아에게 전달하였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그리고 선지자들은 성회(聖會)의 구성원들에게 전달하였다.”23 (131.1)
 엘리야와 관계된 둘째 방향은 미래를 내다본다. 그것은 그리스도 강림의 약속이며 소망의 불을 붙이는 것이다. 요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선지자 엘리야와 연관시켰다.24 마찬가지로 유대 전통에서도 엘리야를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과 연결한다. 거기서 엘리야는 단순히 선구자(先驅者)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대리인이다.25 전설, 유월절 밤 축제에 거행하는 의례들, 안식일의 향수(鄕愁) 어린 노래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기대하면서 엘리야를 부른다. 모세는 우리를 토라로 되돌아서게 하고, 엘리야는 신약의 그리스도적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게 한다. (131.2)
 우리가 요한의 유대—그리스도교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암시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두 계시, 소위 구약과 신 약을 강력하게 떠올린다. 그 두 증인은 함께 예언의 진행과정에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게 둘을 함께 언급함으로써 성경 전체가 유효함을 나타내고, 그 두 증언이 서로 보완적이며, 그래서 둘이 모두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132.1)
 그러나 그 두 문서 너머에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전수해 준 두 백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예언하고 고난을 당하는 남녀들에게 있다(계 11:3, 7). (132.2)
 우리는 먼저 그들의 육체와 그들의 일상 존재 속에 위로부터 내린 토라에 대하여 증언하고, 히브리 성경과 그 예언들을 매우 정성스럽게 보존해 온 유대 백성을 생각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는데, 그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가져왔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땅 끝까지 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약의 문서들을 그 안에 있는 예언들과 함께 소중하게 전수하였다. (132.3)
 이 두 백성이 없었으면 우리는 히브리 성경이든 신약이든, 거룩한 책에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위로부터 오는 진리에 도달하는 통로가 없었을 것이다. 살과 피의 증인들이 없었다면 성경의 문서들은 소리 없이 죽어 있었을 것이고, 박물관의 진열장 안에서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132.4)
 사실 그 두 증언 중의 하나는 어느 한쪽에 의하여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소홀히 여겨졌기 때문에(구약과 토라는 교회에 의하여, 신약과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의하여), 이 두 증인, 이스라엘과 교회는 이제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고 함께 생존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 쪽을 도외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그분의 계시의 한 부분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실제로 그 두 증인은 서로를 조명해 줄 뿐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킨다. 한쪽은 다른 쪽에는 없는, 그래서 필요한 독특한 진리를 제시한다.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