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3장—죽음의 쇼파르
 인(印)에서처럼 쇼파르도 이제 전환점을 맞는다. 넷째 쇼파르가 지난 다음에 요한계시록 8장 13절은 이어지는 세 쇼파르들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117.5)
 메뚜기 떼
 다섯째 쇼파르는 앞선 쇼파르들과 역사적으로 동일한 시각에 놓여 있다. 요한은 떨어진 별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는데(계 9:1), 그것은 고대 바벨의 권력을 생각나게 하는 찬탈의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쇼파르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초래된,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사건들을 언급하였었다. 이제 쇼파르는 땅의 깊은 곳, “무저갱”으로부터 나오는 세력들을 예고한다.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 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계 9:1, 2). 70인역은 히브리어 트홈(tehom, 무저갱)을 번역하는 데 그리스어로 아빗소스(abusso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트홈은 창조 이전 지구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쓴 말이다(창 1:2). 의미심장하게도 창세기 1장은 물, 흑암과 공허의 개념을 트홈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아직 없었더라”(창 2:5)라는 말을 쓴다.9 트홈아빗소스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뒤에 선지자들은 그곳을 그분의 원수인 큰 리워야단의 처소라고 표현하였다(사 51:9; 시 74:13). 위경(僞經)) 에녹 1서는 트홈이 타락한 천사들이 거하는 곳이라고 말한다.10 (118.1)
 계시록의 신탁(神託)은 더 나아가 무저갱을 히브리 이름 아바돈, 즉 멸망이라는 이름으로 의인화한다.11 이 단어는 아바드(abad, 죽다, 멸망하다)라는 어근에서 온 말로서 히브리 성경, 특히 지혜 문학서(잠언, 시편, 전도서 등)에서 대개 악인들의 운명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는 말이다. 12그리스어 아폴뤼온(Apolluōn, 계 9:11)은 동사 아폴뤼나이(apolltunai, 파괴하다. 파멸하다. 상실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같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아폴레이아(apoleia)가 있는 데, 멸망, 파멸을 의미하며 아뷧소스와 마찬가지로 트홈을 번역하는 말로 70인역에서 쓰인다. 히브리어 아바돈과 그리스어 아폴뤼온은 그러므로 동일하게 공허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118.2)
 이 장면에 엄습해오는 흑암(계 9:2)은 넷째 쇼파르의 그것과 다르다. 거기서 흑암은 빛을 내는 천체들에게 일어나는 일의 결과였다(계 8:12). 이번에는 흑암이 다른 곳에서 이르러 온다. 이제 그것은 트홈, 즉 창조 이전 흑암의 일부이다. 그 메뚜기들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짙은 구름을 만들며 빛과 하늘을 가린다. 다섯째 쇼파르는 암흑시대를 지배했던 세력들을 드러 낸다. 그 별은 무저갱에 떨어져서 그것을 열고 공허의 세력들을 풀어놓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함으로써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리와 그분의 통치를 부정하려 하는 곡해, 자만, 불관용(不寬容)과 압제의 세력들을 풀어놓는다. (118.3)
 다섯째 쇼파르는 또한 하나님의 신원(伸寃)을 묘사한다. 교회에 대한 형벌의 씨앗은 그 자신의 행동 속에 잠복되어 있다. 불관용과 압제로 땅 위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함으로써 교회는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인간들이 거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19.1)
 역사는 예언이 확실함을 입증해 준다. 17~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반(反) 성직자 운동은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서양 역사의 중요한 특징이 된 십자군 원정, 이단 재판 그리고 종교 전쟁들에 대한 인류의 대답이다. (119.2)
 예언은 그 공격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하여 메뚜기의 상징을 이용한다. 재앙이 내리는 다섯 달은 그 곤충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일생의 주기와 일치한다. 우리는 동일한 비유를 요엘서에서도 본다. 거기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말[馬]과 닮은 메뚜기의 침입에 비유한다(욜 2:4; 참조 계 9:7). 메뚜기들의 모양, 속도 그리고 군사적인 전략을 생각한다면 그 비유는 인상적이다(참조 호 14:3; 암 6:12). 메뚜기들은 일생 동안(4, 6절)12) 수확을 망치고 구름 같이 떼를 지어 하늘을 덮는다(욜 1:10).

12) 우리말 성경에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으로 번역된 말을 새국제역(NIV)은 “메뚜기, 큰 메뚜기, 어린 메뚜기, 다른 메뚜기들로 각각 번역한다(역자 주).
(119.3)
 다섯째 쇼파르에 의하여 예고된 재앙의 영향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되었다. 메뚜기들은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계 9:4) 공격한다. 인의 상징은 고대 근동에서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지 나타내거나 증명하기 위하여 상품이나 편지에는 인을 쳤다.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 그 상징은 독특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예컨대, 아가(雅歌)에서 술람미 여인은 그녀의 연인과 맺은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 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 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인을 맞지 않은 것은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유 가 아닌 사람들을 나타낸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 의식을 상실한 허울뿐인 기관임을 폭로한다. 교회는 제도나 기관적인 면에서만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백성의 편에서 보면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데 훨씬 더 자유롭고 담대하게 되었다. (119.4)
 게다가 그 메뚜기는 그것이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전갈처럼 쏘기까지 한다(계 9:5).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교회는 살아 남을 것이다. 예언에 의하면 교회의 고통은 다섯 달(5 × 30일), 즉 150년(예언의 법칙에 따르면 하루는 1년과 같다)을 넘지 않을 것이다.13 이러한 재앙은 교회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120.1)
 프랑스 혁명은 교황을 투옥시키기까지 한다(1798).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가서야 라테란 조약(1929)이 비준됨으로에 이전의 상태를 회복한다. 교회의 부활은 그 후 유럽의 정치 무대에서 “기독교 민주당”이라고 자처하는 전후(戰後)의 새로운 정치 파벌이 확산됨에 따라 더욱 힘을 얻을 것이었다. 주로 가톨릭교회의 신도들이 주도하는 이 정파는 종종 연립 정부의 수반을 맡기도 하였다. 오늘날 교회는 막강한 기관이 되었다. 그것의 영향력은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세계의 기아문제와 종교 통합 운동에 대한 비전에 이르기까지 국제 관계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 이 예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메시지는 동일하다. 우리는 메뚜기 떼의 공격을 압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 해야만 한다. 성경은 늘 메뚜기 떼를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한다.14 그것은 다섯 달이라는 기간에도 암시가 되어 있는데, 그 기간은 인간 역사에 대한 첫 번째 전세계적인 심판이었던 대홍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창 7:24). (120.2)
 기병대
 여섯째 쇼파르는 여섯째 인의 부르짖음을 반향한다. 제단 아래서 부르짖는 음성들(계 6:10)은 큰 강 유브라데로부터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음성(계 9:13, 14)으로 대답을 듣는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제 일어날 사건을 압제자(본문에서는 바벨론으로 나타난)에 대한 형벌로 간주해야 한다. (121.1)
 유브라데 강에 대한 언급은 이미 바벨론의 멸망을 암시한다.15 마찬가지로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계 9:20)은 그 제국의 멸망 전야에 대하여 선지자 다니엘이 묘사하였던 바벨론의 우상 숭배를 가리킨다(단 5:23). 그 “귀신”“복술”(下術, 계 9:20, 21) 또한,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면 바벨론의 특징을 나타내며, 그 나라의 멸망을 재촉한다(사 47:12). (121.2)
 다섯째 쇼파르는 전갈의 꼬리를 가진 메뚜기 떼를 “전장으로 달려들어 가는” 군마(軍馬)처럼 급파(派)했었고, 여섯째 쇼파르는 그들을 다시 소환한다. 이제 계시록은 그 침략을 꼬리에 힘이 있는 말들과 비교한다(19절: 참조 10절). (121.3)
 여섯째 쇼파르는 다섯째 쇼파르가 물러간 지점에서 계속되지만, 전투는 더욱 격렬해진다. 바벨론의 대적은 더욱 위협적인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다섯째 쇼파르의 말들은 사자의 이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머리 전체가 사자와 같다(17절). 다섯째 쇼파르의 전사들의 파괴력은 꼬리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여섯째 쇼파르에서는 그 입 또한 치명적이다(19절). 그들의 철 흉갑(9절)은 “불빛”이 되어 있다(17절). 메뚜기들의 쏘는 침은 앞에서는 치명적이지 않았지만(5절), 이제는 목숨을 위협한다(18절). 다섯째 쇼파르의 구름(2절)은 이제 불과 유황으로 강화되었다(18절). 그 침략 세력은 수적으로도 증가되었다. 그 규모에 압도된 선지자는 최상급을 사용하여 “이만만”(즉 2억, 16절)이라고 표현한다. 백만(또는 만)으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낱말 뭐리아스(murias)는 일반적으로 매우 큰 수를 의미한다.16 그 단어는 70인역에서 브두엘의 아들들이 그들의 누이 리브가를 위하여 축복할 때 그녀가 “천만 인” 자손의 어미가 되도록 빌어 주는 대목에서 나타난다(창 24:60). 우리는 또한 다윗의 용맹에 대하여 여인들이 찬양하던 것도 기억한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본 구절에 쓰인 이 단어는 단순히 10,000 × 10,000이 아니라 2 × 10,000 × 10,000을 의미한다.


  (121.4)
 무장한 병력이 그 정도의 규모를 이루었던 적은 없다. 세속적이고 반성직적(反 聖職的)인 무저갱의 세력은 압도적이다. 금세기는 교회를 적대시하는 정치적· 철학적 반응의 폭발을 목격하였다.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출현한 이데올로기들, 즉 마르크스주의, 물질주의, 진화론 그리고 합리주의 등이 우리의 지적(的) 활동에 침투하였다.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조류는 종교계에까지 침입해 들어 왔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랄만한 아이러니를 본다. 하나님의 권위를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바로 이 땅의 반발에 맞선다. 계시록은 다니엘의 예언을 확증한다. 그 의 책 11장에서 그는 동일한 두 세력 간에 다툼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17 하나는 북방에서 기원하여 교회의 찬탈 세력을 이루고, 한편 남방에서 오는 또 다른 세력은 현대 서양 사상을 특징 짓는 세속적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대표한다. (122.1)
 계시록은 다니엘의 예언을 반향하면서 바벨론과 애굽, 두 나라를 언급한다. 떨어진 별(다섯 째 쇼파르)은 유브라데 강(여섯째 쇼파르)과 연관이 있으므로 바벨론에 해당된다. 메뚜기, 전갈, 뱀 그리고 흑암은 모두 다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완고하게 부정하였기 때문에 애굽에 내린 재앙을 떠올리게 한다(출 5:2). 애굽 군대의 대표적인 장비, 병거와 말들도 우리가 애굽을 되돌아보도록 지적한다.18 (122.2)
 다니엘과 계시록의 선지자는 둘 다 동일한 사건을 바벨론과 애굽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예언적 이상이 한 점에 수렴되는 경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니엘 11장에서처럼 계시록의 본 구절도 바벨론의 승리를 예고한다. “종교적인” 권력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19 여섯째 쇼파르의 전사들은 사람의 3분의 1만 목숨을 빼앗는다(계 9:18). 나머지 3분의 2는 살아 남지만, 자기 과신과 우상 숭배에 빠져 있고 회개와는 거리가 멀다. 우 리는 더 이상 바벨론의 대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속적” 권력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한다. 그것은 상대방에 의하여 삼켜져 버린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11장에서처럼 애굽 군대는 바벨론 군대에 연합한다(참조 단 11:43). (122.3)
 우리는 이 예언의 성취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 마지막 사건들은 세속주의의 취약함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붕괴와 합리주의의 실패는 다니엘와 계시록 예언들의 신빙성을 보여 준다.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