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이 때쯤 왁스맨의 식이 요법과 철학에 심취하여, 그의 충실한 제자가 돼 있었던 것이다. (187.6)
이런 왁스맨 요법에 돌입한 지 한 달이 채 못 된 1975년 9월 26일, 내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187.7)
그 날, 화요일 아침 6시 30분, 나는 어느 때처럼 눈을 부스스 비비면서 침대 테이블 위에 놓인 진통제 데르코단병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거의 파불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돼 있었던 것이다. (187.8)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등의 통증이 없었던 것이다. 아주 완전히 없어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파트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연신 허리를 만져보며, “아마도 조금 있으면 그 오랜 통증이 되돌아오겠지” 하는 의심을 일부러 해보면서 걷고 달리고 해봤으나, 전혀 아프지 않았다. (188.1)
지난 2년 동안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등의 통증이 아니었던가? 강한 진통제만이 겨우 이를 동제할 수 있었던 그 통증으로부터 하루 아침에 해방될 수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아픔은 사라졌던것이다. (188.2)
평생 둘러쌀 듯했던 그 압력 옷감같은 통증을 완전히 벗어버린 나는 출근하자마자 데니 왁스맨에게 전화를 걸었다. 등의 통증이 없어진 사실을 알리고, 이것이 혹 자연식 때문인지 말해 달라고했다. (188.3)
“바로 식사 때문이야. 토니, 놀랄 만한 징조야. 정말 너는 훌륭히 암을 정복하고 있어”라고 왁스맨은 기뻐했다. (188.4)
9월이 가고 10월이왔다. 떨어지는 가을 낙엽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암 환자였으며, 거시 생체학 학생이란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188.5)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를 꺼려 했다. 정말, 암이란 전염병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거리를 두고 예기하곤 했으며, 언제나 친절한 변명을 붙여 금방 자리를 뜨곤 했다. 그 자연식 도시락도 나를 늘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병원장이었으므로 여러 학술 세미나, 초청 만찬 등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아무리 요리가 훌륭하게 나와도 나는 그 일본식 도시락을 시부적시부적 놓고 혼자 천연식을 해야 했기 때문에, 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거나 웃음 거리가 되었다. (188.6)
의학계는 천연 요법이니 정신적 치료니 하는 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풍조의 조성에는 과거의 나도 한 몫 끼어들었음이 틀림없다. (188.7)
그 해 가을이 깊어지면서, 나의 건강 상태는 또다시 한 길조(吉北)를 보이기 시작했다. 20년간 고생해 오던 소화 장애병이 점점 힘을 잃어 갔던것이다. 나는 장이 약해 걸핏하면 설사를 하고 복통을 일으켰다. (189.1)
여러 가지 처방을 써 봤지만 별 무효과였던 것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불안에 빠졌던 그 가을철에 소화가 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89.2)
처음에는 수술 덕분에 장기능이 좋아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암에 걸렸다는 진찰을 받기 전에도 이처럼 좋은 위장컨디션은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거시 생체학때문이었던 것이다. (189.3)
1979년 1월 22일, 감리교 병원에서 혈액 검사와 간 검사를 받았다. (189.4)
다음날, 결과과 주치의 셀돈 리스커에게 보내졌다. 리스커는 내 검사 결과를 집어들고 “이건 정말 좀처럼 볼 수 없는 큰 진전이라면서, 내 건강이 크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189.5)
1978년 5월 31일에 받았던 검사에서, 혈액 중 알칼리성 인산효소(ALKAHNE PHOSPHATASE)69,(정상은 9—35), 간 기능 척도인 SGOT와 SGPT가 각각 100과 273이었다(정상은 13-40). 그러나, 1979년 1월 23일의 결과는 알칼리성 인산 효소가 36, SGOT가 21, SGPT가 27 이었다. 정말 기적같은 진전이었다. (189.6)
리스커 주치의는 고환수술과 에스트로젠 주사가 주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 수치만 가지고 암이 잠복기로 들어가는 중이든지, 또 다른 어떤 결과로 인한 잠정적 현상일수도 있으니 계속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여간, 나는 용기가 났다. (189.7)
나는 셀든에게 식이요법 때문에 혹 암이 죽어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주치의는 “아냐, 토니, 아직 식이요법이 암을 물리칠수 있다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어”라고 말했다. (190.1)
그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셀든, 난 식이 요법이 암을 고친다는걸 점점 믿게 되는것 같아. 암의 수술은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이렇게까지 좋아질 순 없어. 나는 정말 건강이 좋아지는것을 느낄 수 있거든.”(190.2)
1976년 6월, 나는 펜실베니아 녹스빌에 있는 천연식 요법센터로 진단을 받으러 갔다. Μ 쿠시는 나의 얼굴, 발, 그리고 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또 손가락으로 여러곳을 눌러본 후 “사릴로박사, 당신은 이제 암을 정복했소”라고 말했다. 그는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자신 있고 만족해 하는 목소리로 거듭 “축하하오”를 연발했다.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