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4 부 안식일과 일요일 제 7장 초기 기독교사에 있어서 안식일과 일요일1
 321년에 최초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요일 법령이 선포된 지 16년이 지난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코매디아에서 세례를 받고 그 며칠 후인 337년 5월 22일 일요일에 사망하였다. 이 때쯤 되어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공의회와 황제의 칙령들에 기초하여 교인들에게 일요일 신앙을 집중적으로 교화시킴으로써 교회법과 시민법에 일요일 준수가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자료에 기초하여 확고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초대 교부들과 역사가들에 의하여 일요일이 안식일로 호칭된 일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20 (400.3)
 사르디스의 멜리토(Melito of Sardis)는 2세기 후반에 “주의 날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한 때 로마교회의 장로를 역임했던 노바티안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3세기에 “안식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그들은 그 책에서 주장하기를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안식일에 대신해서 일요일을 준수하는 일이 전혀 일반화되지 못하였고 단지 교회 안에서 일요일 준수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단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401.1)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당시에 일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저술가들이 오늘날처럼 일요일 준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도행전 20장 7절고린도전서 16장 1-3절계시록 1장 10절 같은 성경절들을 인용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401.2)
 일요일은 태양에게 거룩한 날로 이교도들에 의하여 존중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달력의 성신 주간(Planetary Week)에는 태양의 날이 들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요시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목하게 되었고 급기야 이 날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삼은 것이다. 일요일을 주의 날로 높이는데 특별히 기여한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 교회의 감독들이었다. (401.3)
 그렇지만 제칠일 안식일은 여전히 거룩한 성일로 존중되었다. 그러나 그 날을 격하시키고 폄하하기 위한 조치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금식하는 날로 여기도록 조장하였다. 안식일 준수자들에게서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기쁜 체험을 말살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특히 로마의 감독들이 안식일에 금식하는 관행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관행을 일반화시키지는 못했다. 도처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401.4)
 4세기 전반부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교도와 기독교가 모두 일요일을 종교적인 축제일과 휴일로 간주하고 있는 관습을 지원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일요일 법을 시민법의 차원에서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제칠일 안식일과 일요일이 혼동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일요일 준수를 위하여 십계명의 넷째 계명이 이용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때 이후로부터는 주일로서의 일요일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교회의 날로 급격히 부상된 반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계속적으로 격하되어 갔고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은 국가와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일반으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12세기까지는 제칠일 안식일이 정치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던 공교회로부터도 교회의 금식일로 계속해서 준수되었다. (401.5)
 급기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특별히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일요일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일요일 준수를 위해 안식일 계명이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래로 제칠일 안식일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신 주님께 거룩한 날로 준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기는 한 세기도 없었다. (402.1)
 참고
 1. 이 논문은 Robert L. Odom의 Sabbath and Sunday in Early Christianity (Review and Herald, publishy Assocunt, 1977)를 요약한 것이다.

 2. Pliny the Younger, Letters, book 10, Letter 96, Loeb ed.,(출판, 년), 2: 402-405;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Bk. 3, chap, xxxiii.

 3. The Epistle of Barnabas, chap. 15, in ANF, 1:146-7.

 4. Epiphanius, Against Heresies, chap. 42, in MPG, LXI. 700.

 5. First Apology, LXVI, ANF, 1:185.

 6. The Stromata, in ANF, Ⅱ, 1, 1.

 7. Ecclesiastical History, Bk. 5, chap.22 in NPNF, 2nd Series, 2:132.

 8. On Prayer, chap, xxiii, in ANF, 3:689.

 9. On Fasting, chap, ⅹ in ANF, 4:122.

 10. Ibid.

 11. Homilies on Numbers, Homily xxiii, chap, iii-v, MPL, Vol, xii, cols, 750-755.

 12.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par 4 and 5, in ANF, Vol, vii, 342.

 13. Mansi, Vol, ii, Col, 9.

 14. Bede, De Temporibus liber, chap, iv; MPL, Vol, c, Col, 281.

 15. The Code of Justinian, Book iii, title 12, Law 3; Corpus Juris Civilis (Berlin, 1954), Vol, 11, 108.

 16. The Code of Theodosius, Book Ⅱ, title 8, laco Ⅰ.

 17. Eusebius, The life of Constantine, Book Ⅳ, chaps, xviii-xx; J. Gruterus, Inscriptiones Totius Orbis Romoni, vd, Ⅱ, 164. no. 2.

 18. "The First Ecumenical Council," in NPNF. 2d Series, Vol, xiv, 42.

 19. Commentary on the Paslms, in MPG. Vol, xxiii, Cols 1165-1174.

 20. Footnote no. 22 in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d Series, Vol, 11,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