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4 부 안식일과 일요일 제 7장 초기 기독교사에 있어서 안식일과 일요일1
 안식일과 일요일 문제의 상당 부분은 그 역사성의 문제이고 정통성의 문제이다. 구약의 역사에는 안식일 주일이 있을 뿐이고 일요일 주일은 없었다. 신약성경에도 안식일 주일이 있을 뿐이고 일요일 주일은 없다. 그러면 일요일 주일은 언제부터 어떻게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였고 안식일은 초기 기독교사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아래에서 간략하게나마 초기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의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389.1)
 1세기
 신약 성경의 기록은 안식일과 일요일의 주제에 있어서 너무도 명백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10계명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예배일로 명령하신 제칠일 안식일 계명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고 하셨다. 예수님은 한 주일의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란 인식에 있어서 다른 유대인들과 전적으로 일치하셨다. 예수님이 당대의 여러 유대인 율법가들과 의견을 달리한 부분은 제칠일이 안식일이냐 아니냐 하는 부분이 아니라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일관되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는 입장을 견지하셨다. 그리고 그는 안식일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사랑을 나타내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법적이다”(마 12:12)라는 신념을 확증하셨다. (389.2)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안식일의 공공 예배에 출석하셨고 메시야로서의 공중 봉사를 이행하시던 기간에도 자주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눅 4:16,31; 막 6:1, 2; 눅 13:10-17).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일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막 2:28; 눅 6:5)라고 선포하여 자신과 안식일의 관계를 공적으로 천명하셨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제칠일 안식일은 주님의 날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날이다. 곧 주일이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주장은 바로 그가 창조주로서 세상의 창조를 다 마쳤을 때 제칠일에 쉬셨고 또 그 날을 복주시어 거룩하게 하신(요 1:1-3,10; 엡 3:9; 골 1:13-17; 히 1:1,2; 창 2:2,3; 출 20:11)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390.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시기 직전에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주 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멸망당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너희의 도망하는 날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24:20).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도 제자들로 하여금 안식일 문제로 시험받는 일이 없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게”(출 20:8)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390.2)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폐하셨다거나 안식일을 일곱째 날로부터 첫째 날로 옮기셨다는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모두 58회에 걸쳐 제칠일을 안식일로 언급하였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독자들에게 특별히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무덤에 묻힌 “이 날이 예비일 곧 안식일 전 날”이었으며(막 15:42-46; cf. 눅 23:50-54; 요 19:14, 16-18, 31-40), 그가 무덤에 누워 있는 동안에 그의 제자들은 “계명을 쫓아 안식일에 쉬었으며”(눅 23:56), “안식일이 지난 후인,” “첫 날 매우 일찍이”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 기록하였다(막 16:1, 2,9). 모두가 독자들에게 안식일의 일상적인 준수를 강조하는 언급들이다. (390.3)
 바울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외국 땅에서도 자주 안식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모두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이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다(계 1:10). 요한 사도는 그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은 바가 있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을 주님의 날로 말했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사도들이 가르친 안식일의 교리는 “안식일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9,10)는 것이다. (391.1)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주일의 첫째 날”이란 표현을 8회에 걸쳐 사용하였다. 여섯 번은 예수님께서 첫째 날에 부활하신 사실을 기술하면서 사용하였다. 그리고 한 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구호 연금을 개인적으로 저축했다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바울 편에 차질 없이 부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할 때 사용하였다(고전 16:1,2). 그리고 또 한 번도 역시 누가가 바울의 여행 일정을 기술하면서 사용하였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신자들과 함께 작별의 모임으로 밤늦게까지 떡을 떼고 말씀을 강론하다가 일요일 아침 일찍 앗소까지 20마일의 길을 도보로 여행하였다는 것이다(행 20:7-14). (391.2)
 신약성경에는 주일의 첫째 날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거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구별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첫째 날을 거룩한 안식의 날로 언급한 기록도 없으며, 그 날에 세속적인 일을 금한다는 기록도 없다.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제칠일 안식일만 알았을 뿐이고 일요일 주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391.3)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의 제위 기간(98-117)에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와 키프루스와 키레네 등지에서 일어난 유대인 반란의 결과로 말미암아 로마 전역에 걸쳐 유대인들에 대한 이교도들의 적대감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 사이의 적대적 긴장은 132-135년에 유대에서 바르 코케바(Bar Cocheba)가 주도한 유대 반란으로 그 절정을 맞이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는 끈질기고 피어린 이 반란을 잔혹하게 분쇄하였다. 예루살렘을 초토화하고 유대인들을 그 땅에서 철저히 내쫓았다. 그리고 그 땅에 비유대인들의 이교적인 공동체를 세웠다. 그 때 이후로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의 옛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죄로 다스려졌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틴이 완전히 비유대인들의 땅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 전역에서 유대교는 황제의 엄명으로 불법화되었다. 유대교의 여러 종교 의식들, 그 중에도 특별히 안식일 준수와 유월절 기념과 할례 행위는 사형으로 처벌되는 중죄로 취급되었다. (392.1)
 하드리아누스의 반 유대교적 법령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에 의해 다소 완화되었으나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로마인들의 광범위한 적개심은 상당히 오랫 동안 이어졌다. 따라서 이교도들에게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인식되고 있던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적대적인 감정에 쉽게 연루되어 번번이 이교들의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총독으로 부임한(c. 112) 년소(年小)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가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로 말미암아 당하고 있던 박해에 대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고한 서한에서 “그들(그리스도인)은 습관적으로 특정한 날에 모여”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한 것은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2 (392.2)
 그런데 유대적인 모든 것에 대한 로마인들의 광범위한 적개심은 자연히 로마인들에게 반(反) 유대 정신을 부추기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2세기 기독교회의 사상과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그 중에도 특히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교회에서 이러한 반향이 더욱 뚜렷하였다. 즉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이교 사회의 적개심이 기독교의 사상과 관습에까지 영향을 미쳐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관습에서 안식일 준수를 밀어내고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끌어들이려는 율법 폐기론적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절기들의 대부분이 이교적인 기원을 가진 것들인 반면에 구약이나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절기들은 기독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로마 제국에 편만해 있던 반 유대적 적개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393.1)
 후기의 일부 기독교 저술가들은 2세기 초반에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요일 준수가 시작된 증거로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내는 서한」(Epistle to the Magnesians)에 들어 있는 의심스러운 한 진술을 인용하였다. 이그타니우스는 문제의 그 진술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님의 생활에 따라 살라고 권고하였다. (393.2)
 또 다른 가명의 저술가는 「바르나바스의 서한」이라는 문서에서 같은 주장을 기술하였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신 날을 축제의 제8일로 기념하고 있다”고 하였다.3 앞의 두 서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까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명의 바나바스는 일요일을 “제8일”로 지켰음이 분명하다. (393.3)
 한편 영지주의의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마르키온(Marcion)은 유대인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모욕감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로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을 정규적인 금식일로 삼게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4 (394.1)
 일찍부터 어떤 지역들에서는 신약성경에 그런 명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렸으므로(요 18:28; 19:14) 해마다 유대의 음력 1월 14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느 요일에 해당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유대의 음력 1월 14일에 교회의 유월절을 지켰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14일이 주간의 어느 날에 해당하든지 상관 없이 그 날 다음의 안식일에 교회의 유월절을 지켰다. (394.2)
 그런데 로마의 감독 피우스 1세(c. 143-158)는 1월 14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대신에 1월 14일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구별하여 이 날도 주님의 부활사건의 기념일로 삼았다. 피우스 1세의 이러한 조치는 교회 내에 광범위하고도 장구한 논쟁을 촉발하였다. 이른바 부활절 논쟁이라는 것이다. (394.3)
 주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일요일을 중요시하려는 움직임의 중심지는 로마였다. 부활절 일요일을 중요시하는 차원을 넘어 매주마다 일요일을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2세기 중반에 로마에 거주했던(C. 155) 유스티노스 마르티로스(Justinos Martyr)는 그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매주마다 “태양의 날”에 종교적인 모임을 가지고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하였다.5 이 기록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394.4)
 교회의 부활절(pascha) 논쟁은 로마의 감독 빅토르 1세가 2세기의 말에 다른 감독들에게 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부활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로마 교회의 요구를 거부하는 감독들에게는 파문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더욱 격심하게 되었다. 소수의 감독이 로마의 감독의 편에 섰고 대부분의 감독들이 로마의 요구를 반대하였다. 부활절 논쟁은 그 후로부터도 상당 기간 미해결로 계속되었다. (3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