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5부 예수님은 내 일을 아직 마치지 않으셨다 제25장 제사장은 중보자를 예표한다
 다른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성소”“첫 장막”지상 성소의 둘째 칸과 첫째 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이라는 구절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소”는 분명 “첫 장막”을 언급한 후에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첫 장막”을 현 시대“상징”으로 받아들이는 다음 말들에 의해 계속해서 확인된다. 그러나 옛 성소에서, 성소의 두 부분은 같은 시간에 같이 존재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성소의 첫째 칸이 물리적으로 걷어지거나 그것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한편, 우리가 “성소”“첫 장막”을 하늘 성소의 안쪽 칸과 바깥쪽 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늘 성소의 첫째/바깥 칸이 어찌됐든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 들어가셨을 때 그 존재와 기능을 잃어 버렸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216.1)
 히브리서 9:11~12은 계속해서 승천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을 묘사하고 있다. (216.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216.3)
 앞의 구절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지상 성소의 둘째칸에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갔던 것과는 달리(7절), 그리스도께서는 둘째 성소, 즉 하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성소”는 문자적으로 헬라어의 “거룩한 것들”(the holies)인데, 성소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216.4)
 히브리어 원문에 단순히 “거룩한 것”(the holy)라고 불리웠던 이스라엘 성소 전체를 70인역은 같은 헬라어 표현(“거룩한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출애굽기 36:1민수기 4:15과 같은 성경절들을 참고하라. (217.1)
 히브리서 저자의 시점에서 보면 지상 성소의 제사의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거행되고 있었지만(9:9~10)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오셨던 것이다(9:11). 물질적으로 “서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A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 기능이 중지되었던 때보다 수십 년 전에 승천하셨기 때문에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있다. 히브리서 9장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씌어졌지만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8절은 이렇게 말한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여기는 겹치는 부분이 없다. 그래서 문맥상 “서 있는”이라는 말은 “중요성을 유지하다”라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첫 장막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모형의 기능을 계속할 때만 중요성이 유지되었다.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속죄가 시작되었을 때에 모형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마 27:50~51). (217.2)
 히브리서 9:6-12의 요점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지상 성소의 지성소의 하나님 앞에 “일 년에 한 번” 짐승의 피를 가지고 갔었던 것에 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신의 피를 더 좋은 하늘 성소에 가져가셨다. (217.3)
 지상 성소의 예식들 중 가장 장엄하고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던 이스라엘의 대속제일의 특별 의식들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든 부분은 더욱 위대하다(참고 히 9:23~28). (218.1)
 히브리서 9장에 대한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이 장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분께서 승천하셨을 때 거기서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속죄일의 짐승 희생 제물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성소를 정결케 하는 피를 제공했었듯이(레 16:11, 15)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성소가 정결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소 정결로 이어지는 대속죄일의 과정이 시작되게 했다. 그러나 정결 그 자체는 심판에 관한 일이며 히브리서가 기록되었던 때에는 여전히 미래의 일이었다. (218.2)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제사장의 일 년 동안의 중보 사역은 분향단과 등대와 진설병상이 있었던 성소에서 이루어졌다(예, 출 30:7~8; 레 24:5~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부터 심판 전까지의 중보사역은 하늘의 성소에 해당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 지성소에 들어가신 사실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히 6:19~20; 위를 보라)? 마치 대제사장에게 지상 성소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대속죄일 외에는 금지되어 있었던 것처럼 지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후에 중보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는 지성소에서의 쫓겨나셨던 것인가? (218.3)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이 움직임에 제약을 받았었던 이유는 그들 각자가 죄 많고 죽음의 운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218.4)
 심지어 대속죄일이라도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는 향연의 가리개 없이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레 16:12~13).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며 불멸이신 분이다. 그분은 신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휘장이나 향연 가리개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와 하늘 아버지께서 자유롭게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시지 못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솔로몬 왕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았을 때(왕상 2:12) 영구적으로 벨트에 의해 묶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던 것처럼 성경이 왕좌에 앉음에 관련하여 왕의 신분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왕들이 자신의 왕좌에만 묶여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219.1)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셨고 자유로이 하늘 아버지와 함께 앉으셨다(히 1:3).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면 그분께서는 일어나실수도 있으셨다(행 7:56). 그분께서는 지상의 교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중보자로서 걸어 다니실 수도 있으셨다(계 1:12~20). 그리고 그분은 심판 때의 웅장한 대관식 행렬 속의 하늘 아버지께로 나오실수도 있으셨다(단 7:13~14). (219.2)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그분 자신이 어느 한 장소에 갇히지 않으시고 중보하시는 동안은 성소를 그분 사역의 중심으로 하실 수도 있으셨고, 심판의 때에는 그분의 직무의 중심지를 지성소로 옮기실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막에서 성소의 중보 사역과 지성소의 심판 사역의 기본적인 국면들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의 차이가 그 장소의 차이보다 더 중요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이동하실 수가 있으셨다. (219.3)
 그리스도를 완전히 성소의 한 장소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데 특별히 심판이 시작된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마치 하나님께서 심판이 시작된 이후에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계속해서 호소하시는 것과 같이(계 14:6~12) 그분께서는 심판의 때 우리를 위하여 계속해서 중보 하신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시간에 성소와 지성소의 직무를 모두 수행하신다. 대속죄일에 제사장들이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성소 안에서의 사역을 포함한(출 30:7~8) 매일의 중보 의식들을 행했던 사실(민 29:11)과 비교해 보라. (220.1)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소에서 중보를 계속하셨다는 생각과 그분께서 하나님 면전에서 사역을 해 오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늘 성소에 관한 요한의 계시에는 성소가 하나님 앞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일곱 등불 뒤에 있는(4:5) 하나님의 보좌에 고정되었다(2~3절). 이것들은 하늘의 것과 동등한 지상 성막의 성소의 일곱 등잔이다(출 25:37). 그러므로 요한은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좌를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6:19이 제시하듯이 하늘 성소에 휘장이 있다면(만약 “휘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요한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열려 있었을 것이다. (220.2)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히 10:12)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통해 성소로 나아오도록 초청한다. (220.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221.1)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히 9:24). 그분의 희생으로 인하여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중보자의 역할을 하신다(요일 2:1). (221.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성부 하나님께서 너무 옛적부터 계신 분이라 건망증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상기시켜 드릴 필요가 있게 된 것인가? 아니면 성부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그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를 다시 보셔야 할 필요가 있으신 것인가? 우리에 관한 하늘 아버지의 원하시는 바와 그리스도의 바라는 바가 너무 반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탄원하셔야 하는 것인가? “제발, 제발 아버지여, 나의 희생을 인하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러한 시나리오는 우리가 나머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알고 있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