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5부 예수님은 내 일을 아직 마치지 않으셨다 제25장 제사장은 중보자를 예표한다
 1992년 5월에 나는 히브리 언어와 문학으로 박사학위(Ph. D.)를 마치고 건설현장에서 말뚝을 박을 구멍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Ph.D가 “Post hole Digger”(말뚝을 박기 위한 구멍을 파는 사람)도 의미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206.1)
 나는 1992년 여름에 건설현장일과 정원일, 감리서비스 통신 판매도 했다. 늘 그랬듯이 그 일들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기에 나는 감사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교육을 살려 일할 자리가 나지 않았다. 8월이 되어 새 학기가 가까왔지만 여전히 가르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나의 가정의 필요를 항상 채워주셨기에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206.2)
 내 생일인 8월 31일에 나는 퍼시픽 유니언 대학교(Pacfic Union College)의 종교학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과의 교수 한 사람이 떠나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다. 이제 가을학기는 몇 주 안에 시작할 것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그 자리에 관심이 있을까? (206.3)
 일자리! 지금 당장! 내가 관심이 있냐고? 이보다 더 좋은 생일 선물이 어디 있는가! (206.4)
 그 종교학과 학과장은 나를 본 적도 없었으나 전화로 내게 교수직을 제안했다. (206.5)
 그가 어떻게 나에 대해 알았을까? 그 학과에는 나를 알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 학과에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에 그가 학과장에게 나를 추천했던 것이었다. (207.1)
 그 친구가 나의 존재와 자격과 유용성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알고 믿기 때문에 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나는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207.2)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중보자이시다. 그분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나를 잘 대변해 주실 수 있으시다(히 4:15). 그분은 내가 그분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시기에 때문에 나를 믿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207.3)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가 되신다. 그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시다(요 1:51). (207.4)
 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할까?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아주 오래 전인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셨고 사람들과 소통하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 3:16).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하여 중보자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중보자가 필요하다(히 4:15~16; 10:19~22). (207.5)
 죄는 하나님과 인류를 갈라놓았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에 숨었다(창 3:8). 그들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으로부터, 생명나무로부터 멀리 쫓아내셔야 했다. 그들이 영원토록 살게 되어 죄를 영속시키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22~24절).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는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가려지지 않은 영광을 보고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출 33:20). (208.1)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죄에서 우리를 다시 떼어내셔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시고 하나님께 데려가실 수 있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용서와 완전한 회복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 죽으셨기에 이 일을 하실 수 있으셨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208.2)
 그리스도께서 중보 하는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용서에 기초한(렘 31:34)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마음의 관계이다. (208.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중보 역할을 했던 제사장들이 그들이 성소에 가져간 희생 제물을 단 위에 올려놓았을 때 용서를 받았다. 이러한 용서는 잠정적인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미래의 희생 여부에 따르는 것이었다. 인간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을지라도 제사장들 없이는 용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을지라도 그들의 죄됨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벽이었다. (208.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많은 것들이 훨씬 좋게 변하였다. (208.5)
 히브리서의 주된 목적은 우리에게 바뀐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지상 성전의 인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히 8-9).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의 제물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9:25-28). 그리스도께서 이미 값을 치르셨기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신적(神的)인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9:11~14). (209.1)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에 그분께서는 하늘 성소를 성결케 하시며 제사장으로 취임하셨다. 이 취임은 성경의 많은 책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209.2)
 다니엘 9:24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칠십 이레”의 마지막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와서 “끊어져 없어질 것”이었다(단 9:26).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마쉬아흐(mashiach)인데, 여기서 “메시야”라는 말이 유래했다. 신약 성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크리스토스(christos)로 바로 “그리스도”이다. 물론 옛적에 제사장들이나 왕들도 마쉬아흐라고 불리었던 것이 사실이나(레 4:3, 2; 삼하 22:5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니엘 9장“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실 수 있다. 우리 죄를 위해 둘째 사망과 같은 죽음을 당하셨을 때 “끊어”지게 되셨던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 죄를 속죄하시고, 그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주신 분도 예수님이셨다. (209.3)
 그분의 희생으로 그분은 “지성소가 기름부음을 받”도록 하실 수 있으셨다. 다시 말하면, 그분께서 하늘 성소를 거룩하게 봉헌하셨던 것이다. 그곳이 하늘 성소임에 틀림이 없는 이유는 그분께서 지상 성소의 “제사와 예물”“금지”(27절)하셨고, 지상 성소 그 자체는 파괴되었기 때문이다(26절). (210.1)
 마태복음 27:51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제사 제도를 금지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암시한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이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다. 성소의 휘장은 한 장의 거대한 천이었다. 그것은 높고, 넓고, 두껍고, 무거웠다. 그래서 사람의 방법으로는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을 수 없었다. 성전의 문지기들의 감시를 피해서 성막 앞에 사다리를 세울 수 있었겠지만 전기톱 같은 현대적인 연장 없이는 그 위치에서 휘장을 찢거나 자를 수 없었다. 그럼 누가 휘장을 찢었단 말인가? 분명 바위를 쪼갰던 동일한 힘이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 이셨다. (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