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2부 하늘은 붉다 제6장—외치는 천사들
 마지막 성도들의 특징이 이러하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12절). 정해진 규칙대로 따르는 다수에 대항하여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옛적부터 있는 계명들에 신실하게 남아 있는 소수를 이룬다. 자신들의 업적만을 믿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이 역사의 망명자들은 자기 선조들의 믿음에 진실하게 남아 있다. 영적인 암흑과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는다. 또한 절망 속에도 그들은 희망을 가진다. (177.1)
 그러나 성도라는 개인을 넘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의 근거가 되는 문헌에 대한 언급이 있다. “계명”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두 가지의 언급을 통하여 계시록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중에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암시한다. 한편은 하나님의 율법, 토라요, 다른 한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이다. (177.2)
 계시록은 다시 한 번 두 “증인”(참조 계 11)을 화해시키고, 예수로부터 모세를, 신약으로부터 구약을, 은혜로부터 율법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 된 불화에 반대한다. 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 아직 유효함을 상기시킨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폐기하거나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옛 언약에 대하여 새로워지고 더 깊어진 헌신을 만들어낸다. 예수님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과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을 내포한다. (177.3)
 세 천사의 주요 기별이 심판과 창조라는 두 주제를 맴돌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으로, 심판은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함축한다. 심판은 율법의 선고를 근거로 한다. 성경은 자주 그 둘을 동일시한다. 사실 심판을 뜻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mishpat)는 율법이나 계명을 의미하기도 한다.6 율법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께 순종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 창조의 기적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의미심장하게도 믿음에 대한 유일한 성경상의 정의는 창조와 관계된 문맥에서 등장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 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177.4)
 하나님이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무(無)로부터 창조할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과 존재의 기초를 보이지 않는 것들 위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창조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진화론자에게는 그러한 가능성을 그려볼만한 대담함이 없으며, 그들은 생명이 이미 있던 것들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믿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와 같은 생각으로 그것은 신앙과 창조에 대한 반(反)가 된다. (178.1)
 성도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영원히 외계의 존재로 남아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성도는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그분은 심판하시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한 기별은 내부의 신들을 찾는 문명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심령술과 범신론적인 이론들이 지금처럼 인기가 있었던 적은 없다. 환생, 자연계의 영성(靈性), 심지어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이교주의를 회상하게 하는 고대의 신앙들이 오늘날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을 통한 동양(東洋)의 영향이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78.2)
 실제로 영혼 불멸 사상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스며들어 왔다. 죽음 이후에도 생명의 불꽃이 남아 있다는 이러한 믿음은 우리 문명이 초월적인 외계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하나의 예를 보여 준다. 그러나 창조 신앙은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을 거절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고, 그는 계속하여 그의 창조주의 호흡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창 2:7). 하나님은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하였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창 2:17). 우리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불멸할 수가 없다. 창조에 대한 신앙은 부활 신앙도 가능하게 만든다. (178.3)
 바벨을 사랑하고 죽음의 사상에 대하여 번민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계시록은 어린양의 추종자들을 “복이 있”(계 14:13)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에게는 죽음 너머의 삶이 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13절). 당대의 유대인들은 최후의 심판과 관계된 문맥에서 “행한 일”(그리스어 에르가[erga])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7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미츠보트(mitswot)에 해당되는 말이며, 그리스도인 생활의 선한 행실들을 가리키는 술어이다(계 2:2, 19).

  (179.1)
 바울의 편지에서 그는 그러한 “행실”이 불의 시험을 거칠 것이라고 한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3). 그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랍비도 이렇게 진술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미츠보트가 나와서 오는 세상에서 그들 편에서 증언한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실한 사람들의 “행위”“약속”(히 6:10~12)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남는다고 한다. (179.2)
 “행실”에 대한 언급이 율법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그 행위는 “따라오는” 것이다. 우리는 성도가 더 이상 그것들을 과시한다든가, 자신을 성도로 선전하고 싶어 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을 발견한다. 참된 “행실,” 참된 미츠보트는 그 신자가 죽고 난 후에까지도 남아 있다. 그것은 자랑이나 책략을 넘어서 살아 남는다. 그 “행실”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이다. (179.3)
 세 천사가 심판과 창조를 선포하는 것은 그러므로 인간 역사의 틀이 되는 두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언급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의 시작과 끝이다. 천사들은 또한 관점의 변화, 삶의 탈바꿈을 촉구한다. (180.1)
 심판과 창조를 짝지어 놓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긴장을 형성한다. 한편으로, 창조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 자연, 기쁨, 사랑 그리고 생명에 대하여 긍정하는 삶을 경축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쾌락은 율법, 규율 그리고 심판에 의하여 평가된다. 성경은 이러한 긴장을 가장 첫 번째 명령에서 소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180.2)
 이 동일한 긴장은 전도서에서도 나타난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180.3)
 우리는 아직 그러한 긴장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종교 공동체들은 너무나 자주 그 두 극(極)의 사이를 나눈다. 한편에는 심판과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거룩하고 굳건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엄격함과 완전을 미덕으로 장려하며 그것들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선포한다. 다른 편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이 되신 십자가의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관대한 자유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신앙을 좋은 느낌으로 격하시키고, 구원은 쉽고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180.4)
 심판과 창조의 두 가지 선포는 그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Abraham Heschel)은 “거룩하면서도 인간적인”9존재가 되는 것이 이상(理想)이라고 하였다. 그의 깨달음은 하나님과 인간 양쪽과 다 씨름하는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다가 남녀들과 함께 살고, 먹고, 웃으며 노래하는 예수님을 추가한다. 우리는 그것이 기도 안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본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또 그러한 개념은 음식물과 섞이면서도 그 맛을 유지해야 하는 소금의 이미지(마 5:13)에도 나타난다. (180.5)
 그러나 이러한 교훈과 이러한 이상을 넘어서 심판과 창조의 선포는 하나의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실제를 지적한다. (181.1)
 심판과 창조를 결합시킨 데는 대속죄일의 정수(精髓)가 들어 있다. 레위기 16장에 규정된 킵 푸르의 의례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기도는 모두 심판과 창조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심을 입증한다. 성경의 킵푸르 의례에 들어 있는 상징들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일개인의 운명을 넘어서까지 확장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레 16:21, 22), 성소 자체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속죄되었다고 선언된다(16, 23절). 고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속죄”는 일개 봄 대청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적인 사상 속에 지구 전체의 속죄를 상징하였는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과 성막을 천지 만물의 “소우주”(小宇宙)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10 (181.2)
 창조와 성소의 명시적인 연관은 시편에 나타난다.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시 78:69).11 그것은 성소의 건축 이야기에도 드러나 있는데, 마치 창조 이야기를 거울로 반사하듯이 묘사한다. 창조 이야기(창 1:1~2:4)처럼, 성소에 관한 단락도 동일한 일곱 단계의 진행을 따르고 있으며, 일곱째 단계는 동일한 히브리어 표현인 “역사(役事)를 필하더라”(출 40:33; 참조 창 2:2)라는 말로 끝낸다.12 (181.3)
 의미심장하게도, 솔로몬 성전 건축의 기사에도 일곱 단계의 진행이 있다. 그 이야기는 7년의 기간들로 구성되며 그리고 동일한 표현, “모든 일을 마쳤으니”(왕상 7:40)로 마무리 된다. 성경 전체에 이 표현이 오직 세 번, 이 구절들에서만 나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으며, 그렇게 성소와 창조의 관련을 맺는다. 역으로,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의 성소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창조 자체를 묘사한다.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사 40:22)13마태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세상의 멸망과 동일시하고(마 24:1~39),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땅이 갈라진 것과 상응한다(마 27:51). (181.4)
 킵푸르의 의례는 지구 전체의 정결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재창조를 가리킨다. 그 때문에 성경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새 예루살렘”의 창조와 함께 묶는다(계 21:2; 참조 사 65:17, 18). 다니엘 선지자 또한 다니엘 8장의 우주적 킵푸르를 묘사할 때 창조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단어를 사용한다. “저녁과 아침”(단 8:14. 개역한글판에는 “주야”로 되어 있음—역자 주)이라는 표현은 이곳 외에는 창조 이야기의 문맥(창 1:5, 8, 13, 19, 23, 31)에서만 볼 수 있다.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