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신약의 난해 문제 질문 75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방언은 무엇인가?
 1. 문맥은 이 방언이 실제 언어임을 보여 준다. 고린도전서 13:1“사람의 방언”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 말은 확실히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바울은 가정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다 내가 외국어를 말하고 천사처럼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것이다. (381.1)
 2. 신약 전반에 걸쳐서 “언어”를 의미하는 같은 헬라어 글롯사가 방언의 은사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외국어를 가리키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방언도 외국어로 이해해야 한다. 난해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전서 14장“방언”이 분명하게 외국어를 가리키는 사도행전 2장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381.2)
 3.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을 통해 역사한다.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이해할 수 없는 지껄임, 마 6:7)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주님께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를 말하라고 독려하실 리 없을 것이다. (381.3)
 4. 고린도전서 14:21은 이 문맥에서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정의 같은 것을 제공한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생소한 입술[외국어]”, 곧 문자적으로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28:11을 인용한다. 이사야 28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른 방언 곧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앗수르 인들임이 드러난다.〈70인역〉은 “다른 방언”글롯사 헤테라라고 번역한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결합하여, 헤테로글롯소이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유비는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일도 [이사야의 상황과] 같은 경우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들’이 방언 말하는 자들을 통해 유입되었으나 듣는 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3 고린도전서 14:21이 분명하게 외국어에 관해서 말하므로 2절 역시 실제 인간의 언어를 가리켜야 한다. 더욱이, 오순절에 실제 언어를 말한 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표적이 되어 그들을 회개로 이끈 것처럼(행 2:28), 고린도전서 14:22에서도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졌다. (381.4)
 5. 성령의 은사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으며(고전 12:7), 따라서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382.1)
 6. 방언의 은사가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오순절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거기서 그것은 외국어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마가복음 16:17에 언급된 예언의 성취였다.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사건들이 고린도전서에 제시된 사건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일어났지만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사도행전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사도행전 2장과 방언의 은사를 말하는 사도행전의 다른 본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연관성이 있다. (382.2)
 (1) 고린도전서 14:22, 23사도행전 2:13에는 방언에 대한 유사한 반응이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치거나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382.3)
 (2) 방언 말함은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고전 14:22; 행 2:14~41).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어 그들을 회개로 이끈다. 방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는 표적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성경에 보도된 결과들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382.4)
 (3) 사도행전 2:4에 나온 헬라어 구절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롯사이스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는 고린도전서 14:21에 나온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표현(엔 헤테로글롯소이스 랄레소)을 떠올리게 한다. (382.5)
 (4) 사도행전 2장에서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외국어를 지칭하는 “방언 말함”의 영적 은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사도행전 19:6에서 누가는 어떤 제자들이 이런 은사를 받은 상황과 바울을 결부시킨다. 바울이 이 신자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가 같은 구절을 바울이 사용한 것과 다르게 이해하거나 사용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383.1)
 요약
 위의 논의는 방언의 은사를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고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함을 보여 준다. 고린도전서 14:2의 상황은 이렇다. 소통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되는데, 하나님은 모든 언어를 다 이해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에서 방언의 은사는 참으로 성령의 은사였으나 남용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영적 은사들이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축복이 되고 방해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올바로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383.2)
 Ekkehardt Muller (383.3)
 미주
 1. Raymond F. Collins(First Corinthians, Sacra Pagina Series, Volume 7 [Collegeville, MN:The Liturgical Press, 1999], 492)는 랄레오레고를 구분하여, 레고는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문맥에서 함께 나타나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9:8; 12:3; 14:21 등에서는 상호 교대로 사용된 것이다. 바울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며(랄루멘고전 2:7). 또한 신자들에게 “비밀을 말한”다(레고, 고전 15:51).

 2. <70인역〉의 이사야 29:24; 32:4도 어눌한 자의 혀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울 것이라고 말한다.

 3. Gerhard F. Hasel, Speaking in Tongues:Biblical Speaking in Tongues and Contemporary Glossolalia (Berrien Springs, MI: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Publications, 1991), 140. (384.1)
 “그[그리스도인]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며, 밝혀 주신 길로 꾸준히 전진하고, 그분의 가르치심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관념들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명상과 묵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는 성경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는 신적인 지혜를 발견할 것이다”(사도행적, 474). (3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