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으니라”(마12:13). (44.4)
 이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는 참으로 놀라운 선포였다. 안식일에 아무런 일이라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선한 일은 해도 괜찮다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과 양을 건지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라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주님께서 병을 고치시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고소하고자 벼르고 있었다. (44.5)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안식일관을 버리지 않고 있는 유대인의 그 완악함에 근심하셨을 뿐만 아니라 노하기까지 하셨다. 이 분노는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서 애끓는 심령으로 적대자들의 고집스런 완악함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드디어 주님께서 마음을 꿰뚫는 안광(眼光)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는 손 마른 환자에게 말했다. (44.6)
 “네 손을 내밀라” (44.7)
 이 환자는 안식일에 병고침을 받아도 괜찮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손이 낫기를 갈망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다. 아 이게 웬 일인가! 말랐던 손이 정상적인 혈색(血色)으로 돌아오고 마비됐던 손이 순식간에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실로 즉각적인 치유였다. 그는 건강하게 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쥐고 마구 흔들며 기뻐 감격하여 예수님께 거듭 사례(謝禮)했다. (44.8)
 “주님, 감사합니다.” (45.1)
 “나의 마른 손을 치유해 주시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45.2)
 즉시 회당 안은 수군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해졌다. (45.3)
 “안식일에 병을 고쳐줘도 되는가?” (45.4)
 “안되는데∙∙∙” (45.5)
 “뭐, 괜찮은 일이겠지.” (45.6)
 완고한 바리새인들은 분노를 터트리며 크게 소리쳤다. (45.7)
 “아니 병을 고치는 일로 안식일을 범하다니, 당장 고소를 해야겠어.” (45.8)
 이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심히 옳다는 것을 친히 치유의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석공의 말랐던 오른손이 치유되므로 유대인의 관습은 자연히 정죄(定罪)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적개심(敵氣心)은 더욱 불타올랐고 예수님을 거룩한 안식일을 파기하는 자로 단정해 버렸다. 예배는 계속됐으나 바리새인들은 분한 마음으로 회당에서 나가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꼬 의논하였다. 헤롯당(Herodians)이란 헤롯 가계를 지지하는 정치적 집단이다. 바리새인들은 통상 헤롯당을 미워하여 원수같이 지냈으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모의(謀議)에는 정치적으로 결탁한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그들에게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 시켰을 뿐이다. (45.9)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왜 기적을 행하셨을까? 다시 말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릇된 안식일관을 바로 잡아 참된 안식일의 목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에는 생명을 구하는 일과 선한 일은 행해도 된다. 더구나 병자들을 보살펴 주고 치료해 주는 일은 안식일의 참된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속적인 일은 피해야 하지만 선한 일은 즐거이 행하여 축복 받도록 주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할수 없는 일을 너무 세세하케 규정하므로 마치 족쇄(足鎖)로 발목을 채우는 꼴이 되었고 세칙(細則)에 의해 선한 일까지도 할 수 없게 돼 버려 기쁜 안식일이 되레 심적(心的) 짐으로 가중(加重)되는 하나의 수렁이 되게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안식일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보다 더 귀중하게 돼 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마카비 1서 2:31-38까지 보면 그 당시 안티오커스 군대가 안식일에 공격해 왔는데 동굴에 숨어 있던 일천여 명의 유대인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굴을 막지 않았고 반항이나 어떠한 반격도 하지 않고 죽어 갔다. 안식일이라는 제도를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제도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은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도 괜찮은 것이다. (45.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손 마른 환자를 동조(同調)하여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치유 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 사업도 방해하고 있었다. 육체적 노동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그 환자를 고치실 텐데 그것을 일로 보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고소거리를 찾고자 회당에 왔다. 배우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바리새인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다. 신자와 목사의 결점에만 관심이 있고 교회 사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전도 사업에 방해자가 된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46.1)
 그러면 석공이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치유 사건을 잘 분석해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46.2)
 첫째,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능히 자기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손 마른 병은 비록 그 당시 인술(仁術)로는 불치병이었지만 주님은 쉽게 고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훌륭한 믿음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볼 때 그 당시 석공의 믿음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반신반의했다면 치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47.1)
 둘째, 그는 마음속 믿음을 행위로 행사하여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안식일에 회당으로 찾아갔다. 주님께 찾아가는 믿음이 치유를 체험한 두 번째 동인이었다. 믿음은 활용해야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 (47.2)
 셋째,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께 치유해 줄 것을 간청한 것이 세 번째 동인이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 있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즉시 마른 손을 내보이며 치유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손을 낫게 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간청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그 당시의 관습을 깨는 매우 담대한 행동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권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