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1 장 믿음을 활용하여 치유 받은 기적들 기적 1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16.3)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16.4)
 주님의 명령을 받은 중풍 병자는 즉시 순종하여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마비됐던 모든 신경과 근육이 정상으로 발동하더니 사지(四1技)에 힘이 생기는 게 아닌가! 그는 벌떡 일어나 꼿꼿이 섰다. (16.5)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놀라고 기뻤다. 38년간이나 반신 불수(半身不隨)로 지낸 무기력한 중풍 병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하여 곧장 일어난 것이다. 완쾌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린 게 아니라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일어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유를 일으키는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으로 중풍 병자는 영적 및 육적 치유를 받았던 것이다. 건강하게 된 그가 허리를 구부려 자리를 둘둘 말아 들었을 때 이미 자기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분은 보이지 않았다. 감사와 찬양이 폭죽처럼 터져나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으며 너무나 기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에 자리를 들고 걸으며 뛰어갔다. (16.6)
 사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편협(偏狹)한 유대인들은 다 죽어 가던 병자가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안식일에 이부자리를 들고 걸어간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었다. 왜나하면 율법의 세칙(細則)에 의하면 안식일에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은 운반할 수 있었지만 환자 없는 침상을 운반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고의로 안식일에 공중 앞에서 자기 집으로 무슨 짐이든지 들고 가는 자는 돌로 쳐죽일지니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왜곡해서 축복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하는 멍에의 날이 되게 했다.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는 옷에 바늘 하나를 꼽고 다녀도 짐을 운반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핀도 결코 가슴에 달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물며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이 그들 눈에는 얼마나 큰 죄로 여겨졌겠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사람을 보고 힐책했다. (17.1)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 (17.2)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17.3)
 고침을 받은 자는 안식일에 치유 받은 것과 침구(寢具) 를 들고 가는 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계속 질문했다. (17.4)
 “그 사람이 누구냐?” (17.5)
 그는 그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실 자기를 고쳐 준 분이 누구인지 그때까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17.6)
 그는 고침을 받은 것이 너무나 고마워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향했다. 38년만에 올라가게 된 성전이었으니 얼마나 기뻐 감격했겠는가! 뜰에서 성전으로 막 뛰어 올라가는데 조금 전 환한 얼굴로 굽어보며 자신을 치유해 주신 바로 그분과 눈길이 마주쳤다. (17.7)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18.1)
 그제야 비로소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게 됐고 너무나 기뻐 마구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18.2)
 “여러분 바로 이분이 38년간 중풍으로 누워 있던 저를 고쳐 주신 분입니다.” (18.3)
 그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고픈 의도로 간증했지만 불행하케도 그것은 그만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반감(反感)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핍박을 받게 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돼 버렸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목질시(反目姚視)가 더욱 심화되는 계기(契機)가 된 것이다. (18.4)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죄가 육체적인 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죄의 용서와 육체적인 치유 사이에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병이 다 나았다고 또다시 허랑 방탕하면 더 심한 병에 걸린다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18.5)
 그러면 38년간이나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신유(神癒)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치유 사건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두가지 긍정적인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불치병(不治病) 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만일 그 원리들을 자신의 생애에 똑같이 적용해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의 치유를 체험케 될 것이다. (18.6)
 첫째, 중풍 병자가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그가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38년간이나 병으로 신음했었지만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아니했고 어떻게 해서라도 병든 몸이 꼭 나아야겠다는 의욕만을 가졌다. 그리하여 38년간을 버틸 수가 있었으며 치유를 위해 베데스다 연못가에까지 가게 된 것이다. 지혜자 솔로몬은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라고 했다. 환자의 치료에는 꼭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욕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주지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절망하여 삶의 의욕을 포기하면 환자는 결국 고침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꼭 나아야겠다는 삶의 강한 의욕이 마음에 있을 때 그 환자의 치유는 분명히 가능해진다. 주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에게 꺼져 가던 바로 그 삶의 의욕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이신 것이다. 결국 긍정적인 강한 삶의 의욕이 중풍 병자에게 있었기에 신유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시 118:17)라는 긍정적인 의욕이 있을 때 주님의 치유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18.7)
 둘째, 중풍 병자가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의심 없는 믿음의 활용이었다. 주님께서 다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을 때에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하여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생명력이 38년간이나 마비됐던 모든 근육과 신경에 부여돼 불구(不具)가 됐던 사지(四肢)가 약동을 시작하여 결국 제 발로 꼿꼿이 일어섰을 뿐 아니라 즉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38년간이나 병상에서 누워지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고 일어서려고 작정할 때 설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가 완전하게 나았다고 믿고 걸어가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사 바로 그것이 신유를 체험하게 된 두 번째 동인(動因)이었다. (19.1)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중풍 병자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신 것이다. 일어나라고 했을 때 의심하고 “내가 일어날 수 없는데 일어나라 하다니”라고 투덜댔다면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치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협력으로 가능해진다. 오늘날도 병든 몸이 낫기를 원하는 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순종 없는 믿음이란 아주 가식적(假飾的)인 믿음이다. “내게 돌이키라” “새 마음을 품으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등의 하나님 명령에 우리가 즐겨 순종하는 것은 사실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협력 없이는 우리가 그분의 치유의 은사를 결코 체험치 못할 것이다.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