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교육이나 의지력의 행사 그리고 그 외에 사람이 만든 어떠한 방책도 자아중심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악한 본성을 대적하는 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적 성향들로 인해 모두가 필연적으로 도덕적 파멸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자 시도하기 전에 반드시 회심을 먼저 경험해야 한다(참조 구원론 I. E). 악한 성향들이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회심 이전처럼 불가항력적인 권세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중생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항에서 자세히 고찰하게 될 것이다. (265.4)
 죄의 위협적인 특성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그 열매로써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사람의 본성 속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죄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롬 7:19) 이유는 “내 속에 거하는 죄”(17, 20절)때문이다. 성경은 여기에서 사람 속에 거하면서 그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것을 “죄”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에는 악한 행위만이 아니라 그 성향들도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265.5)
 사람의 타락한 의지에 관해서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 한 번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면에서는 “형제들과 같이 되”셨지만(히 2:17) 죄는 없으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인 우리 와는 달리 그분은 “거룩한 자”(눅 1:35)로 잉태되고 태어나셨다. 그분은 한 번도 죄된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으시며(벧전 2:22), 악한 자가 그분에게 전혀 “관계 할 것이 없”었다(요 14:30). 이 주제에 대한 더 상세한 고찰은 성경적 그리스도론의 영역에 속한다(참조 그리스도 I. B. 2). 하지만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와 관련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예외적인 경우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65.6)
 4. 성향을 극복함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는다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가항력적인 그 어떤 성향에 대해서도 맞서 싸워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일은 우리가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의 선천적인 패배의 유전 인자가 위로부터의 거듭남을 통해 바뀔 수가 있다(요 3:5-8).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분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동일한 이 죄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신약의 수많은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듯이, 모든 신자들은 그분을 “좇”고(마 10:38) “본받는”(엡 5:1, 2)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266.1)
 사도 바울이 로마서 7:22-25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법에 대한순종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이다. 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였지만 “한 다른 법”이 그의 “마음의 법과 싸”웠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바울 개인만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일이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상세한 고찰은 그리스도론의 영역에 속한다(참조 구원론 III). 인류의 현재 상태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한가지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싸움은 헌신적인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매우 격렬한 싸움이다. (266.2)
 우리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일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경계를 늦춘다면 이 영적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롬 13:12; 고후 10:4; 엡 6:10-13; 벧전 5:8, 9). 이 투쟁은 회심한 사람 속에 존재하는 “육체의 소욕”“성령의 소욕”, 이 두 종류의 정반대되는 속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투쟁이다(갈 5:17). (266.3)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들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 아파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울과 더불어 “내 자신이∙∙∙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칭송하는 그 하나님의 뜻을 하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도 스스로 이룰 수 있다는 자아확신의 올무에 쉽게 빠지게 될 것이다. (266.4)
 하지만 사람의 현재 상태는 몇 번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우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 불안정한 모습이 지속된다. 그는 죄와 싸우는 자신의 싸움을 계속해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고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매일같이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마 6:120, 또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얼룩을 계속적으로 씻어 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주는 세족예식을 제정하기도 하셨다(요 13:10, 12-17;참조 예식들 II. A-D). 거듭남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요일 5:4) 바로 그 동일한 편지서가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죄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면서(요일 1:8) 동시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10절) 경고의 말도 하고 있다. (266.5)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죄로 향하는 성향 때문에 우리의 완전한 구원은 재림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는 내재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이 성향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재림의 날까지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그날까지는 모든 죄된 성향과 모든 불완전함이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오직 그날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그와 같”이(요일 3:2) 될 것이다. (266.6)
 5. 인간의 타락 및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선천적으로 타고난 악한 본성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우리의 첫부모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표시들 중 하나다(엡 2:3). 그들과 한 혈통에 속한 우리(행 17:26)는 그들이 그 큰 시험에 실패함으로 잃어버린(창 3; 6:5) 본래의 타락하지 않은 의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 시험을 통과 하였더라면 우리는 지금처럼 죄 가운데서 살지 않고의 가운데서 살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266.7)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로 슬픔, 고통, 종신토록 하는 수고, 사람들 사이의 착취적인 관계 그리고 죽음이 이르러 올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창 3:14-19).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선언에 완전히 부합되는 삶을 살고 있다. (267.1)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서 서로 간에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변화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에도 피해를 입혔다. 우리와 자연과의 상호 관계는 에덴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기아와 질병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생태학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혼 관계가 처음에는 예속의 개념으로 변질되었다가 그 후에는 있든 없든 별 상관 없는 모조품 같은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또한 변질된 수평적 관계를 보여 주는 실례들 속에 계급 착취, 노예제도, 경제적 불평등 국가와 민족 사이의 전쟁들 그리고 사회 구조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다른 악습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사회 구조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죄악의 수평적 구성 요소를 위험할 정도로 단순화시킨 매우 단편적인 진단에 불과하다. (267.2)
 C. 궁극적 원수인 죽음
 1.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
 죄는 계명을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근본적으로는 창조자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재이신 그분이 이 문제를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하셔야만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죄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고 그 형벌이 범죄에 대한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잠 5:22; 갈 6:7). 하지만 이런 형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형벌들도 있다(출 32:33; 마 25:41). (267.3)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교육하실 때 가하는 징계 중에는 교정을 위한 징계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이러한 징계를 가정에서 아이의 교육을 위해 행하는 유용한 징계와 비교한다(시 94:12; 히12:5-12). 어떤 사람들은 악인들을 교정하기 위한 이 같은 징벌들만을 적법한 것으로 받아들이다. 하지만 교정을 위한 징계는 그 목적이 공의의 목적과는 전혀 다르다. 받아 마땅한 징계의 정도는 개선해야 하는 행실의 정도보다 더 클수도 있고 더 작을수도 있다. (267.4)
 엄정한 공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징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것을 증오나 원한에서 기인한 형벌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복수심이 그 형벌을 지배하고 공의는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징벌은 복수와는 상관없이 그분의 공의를 따라서 무한한 사랑 속에서 행하여진다.(참조 심판 II. E) (267.5)
 하나님께서는 우주적인 반역을 폭력이 아닌 설득과 사랑을 통해서 해결하기로 정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편으로는 죄인들에게는 유예의 시간이 주어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각 사람에게 회개하라는 초청이 주어졌다(벧후 3:9). 하지만 피조물들의 죄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토록 공존할 수는 없다. 율법을 주신 분과 창조주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피조물들의 죄된 반역은 소멸을 당하기에 마땅한 범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조상이 경고를 받은 이 죽음의 형벌(창 2:17)은 죄에 대하여 지불되는 공의롭고 정당한 값이다(롬 6:23). (267.6)